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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항포 대첩의 숨은 영웅 기생 월이月伊,[간사지<위치:고성군 마암면 삼락리>/속싯개/고성문화유산] <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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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2017. 4. 11.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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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월이月伊

 

고성사회에는 오래전부터, 정확하게는 420년 전부터(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는 1592년이고 지금이 2012년이니까)구전口傳으로 전해져 온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기생 월이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구전이란 구록에 비해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나 그렇지가 않다. 구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이기 때문에 잡초과 같은 끈질긴 생명력이 있어 거기에는 꾸밈이나 거짓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반면에 때론 기록은 기록하는 자의 의도에 따라서 첨삭하여 왜곡되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기도 하는 것이 기록문화의 결함이 아니던가.

 

 

 

세계의 고전 중에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딧세이아》는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을 기록한 것이며 그리스가 낳은 세계 3대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퀼로스의 작품도 구전에 의해 전해져 온 것이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은 구전을 소재로 한 전령적인 구전문학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탈무드》나 아랍의 경전인 《코란》도 구전으로 설파하는 전담 지도자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활약한 대표적인 기생으로 진주의 논개와 평양의 계월향이 있어 그녀들의 활약상을 기록해 둔 야사野史라도 있는 반면 고성의 월이는 야사마저 없어 그동한 고성의 물정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진정성에 의구심을 품어왔는데 향토시인이자 작가인 정해룡이 그의 역사소설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를 통해 역사 뒤안길에 묻혀 있던 월이를 세상 밖으로 살려내었다.

진주의 논개는 적장 하나만 안고 죽었으나 고성의 월이는 왜적의 함대 26척과 약 3,000여명의 적 수군을 대파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다. 일찍이 우리나라에 이런 기생 있었던가. 없었다. 논개도 휼륭한 기생이지만 월이의 활약은 논개와 단순 비교할 수 없다.

문학작품 속에 묘사된 월이의 자취를 더듬어 보자.

 

 

 

고성읍성에서 북으로 2리 가량 떨어진 곳에 무기산舞妓山이라는 곳이 있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낮은 야트막한 동산 위에 둥근 밥그릇을 뒤집어 놓은 큰 무덤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산을 흔히 똥메산(독뫼산)이라 불렀다.

무기산은 이름 그대로 기생 관련이 있는 산이다. 고려시대 고성 수령인 고주지사가 기생을 데리고 이곳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무기산 아래 물맛 좋은 무기정이란 우물이 있는 무기정이란 술집이 있었고 그곳에 월이月伊라는 현명하고 아리따운 기생이 있었다.

-정해룡《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에서 32∼33쪽

 

“선조가 집권한 조선은 건국한 지 2백 년을 지나는 동한 전쟁다운 전쟁이라곤 겪지 않은 평화로운 시대였잖아.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수년에 걸쳐 수례 정보를 주었어도 아무런 준비 없이 큰 전쟁을 맞았으니 그 결과는 뻔했지 뭐. 무능한 임금은 자기만 살고자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고 날이면 날마다 정쟁만 일삼던 관료들도 제 한 몸 살리기에 급급했으니 민초들의 삶은 그야말로 깨어진 날카로운 유리병 위로 맨발로 갇는 격이었다는 표현이 딱 걸맞을 거야.”

영대는 향토사를 연구한 탓에 그 방면에 박식했다. 그는 숨이 가쁜지 잠시 물 한 모금을 청해 마신다.

“한번 생각을 해 봐. 그 당시 여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엄혹했고 더욱이 기생이라면 최하위 계층의 신분인데도 기생의 몸으로 적장을 한고 장렬히 죽어갔음을 처음에 조정에서는 인정하여 하지 않았겠지. 왜냐하면 그걸 인정할 자신들의 체면은 얼굴에 똥칠을 한 셈이 되거든, 일개 하찮은 기생도 자신의 몸을 초개같이 버렸는데 임금과 자신들은 도망만 갔으니 어떻게 인정을 하겠노. 훗날 오두인, 박태무, 민백순 등이 자꾸 논개를 크게 부각시킴은 무능한 임금과 신하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이었고 그 알량한 양반과 선비사회에 대한 통렬한 질책이 아니었겠어? 결국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인정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논개를 존선의 잔 다르크라 불러도 되겠네!”

“조선의 잔 다르크?”

영대는 미자를 빤히 쳐다보며 웃는다. 모두들 웃었다.

“그 이름에는 논개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 딱 한 사람 있어!”

“그게 누군데?”

미자는 궁금해 한다. 모두 다 영대를 쳐다본다.

“논개에 가려 이제껏 빛을 보지 못한 월이라는 기생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야.”

“월이가 누군데?”

태상은 처음 들어보는 월이라는 이름에 의아해 하는 모습이다.

“고성의 월이 말제?”

고성 출신인 부녕은 월이 말이 나오자 그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그래. 맞아. 고성의 기생 월이.”

“월이는 임진왜란 때 고성 당항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었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간첩이 고성의 지도를 그려갔는데 그때 월이는 몰래 그 지도 위에 선을 그어 길이 없는에 길이 있는 것처럼 변조를 했거든. 왜놈들은 그 지도를 믿고 당항포에 들어왔다가 몰살을 당했다 카더라.”

“그런 일이 있었어? 있었다면 무슨 기록이라도 남아 있었을 텐데?”

태상은 못 믿어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다들 못 믿어 할 만도 하지. 논개는 어우야담에 단 몇 줄이라도 기록이 남아 있었으니 살아남아서 오늘날 추앙을 받고 기려지고 있는데 반해 월이는 그런 기록은 없고 다만 고성 땅에서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온 이야기뿐이었으니까/”

“정말 구미가 당기는 애기구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라.”

태상은 영대가 한 말에 더욱 알고 싶어 한다.

“너희들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어사 유몽인이 진주에 들려 순시하다가 그곳에 떠돌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책에 기록을 해 놓았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논개가 고성의 월이와 무엇이 다르겠나? 논개도 오늘날까지 다만 입에서 입으로면 전해 져 온 고성의 월이처럼 똑같이 설화 속의 인물 신세가 아니었겠어?”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수긍하는 태상은 영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계속하라는 눈빛이다.

“유몽인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성안의 사람들이 몰살을 당해 순안어사로서 진주백성을 위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어. 그때 만약 유몽인이 고성 땅에 왔었더라면 고성의 민초들 사이에서 떠돌던 월이의 활약상을 듣고 분명 어우야담에 기록해 두었겠지. 안타깝게도 진주는 오늘날로 치자면 도청 소재지였고 고성은 일개 변방에 불과했으니 고성으로 온다는 것은 안중에 없었다고 봐야겠지.”

“그럼. 월이가 논개보다 뛰어난 점이 무엇인데?”

영대에게 거듭 질문하는 태상은 점점 진지해졌다.

“논개는 임진왜란 때 일개 적장 하나만 안고 죽었을 뿐이지만 월이는 아까 부녕이가 한 말대로 당항포해전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 그렇다고 한갓 기생인 아녀자의 몸으로 칼을 차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아니고.”

목이 마른지 영대는 물을 마신 뒤 하던 말을 이어간다.

“당항포해전의 격전지인 그 바다는 사실 적들이 들어가서는 안 될 지형이거든. 소위 퇴로가 없는 사지인 셈이지. 그곳 지형을 그린 지도를 펼쳐놓고 관찰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어. 퇴로가 없는 그 길을 일본의 수군이 대 함대를 이끌고 왜 갔을까 하는 것이야.”

“왜 갔는데?”

“왜적의 함대가 소소강召所江 서쪽에 있었다고 한 이순신의 장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 서쪽은 바로 고성읍 쪽이야. 그것은 바로 왜적의 간자가 만든 지도에 월이가 길이 있는 것처럼 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이었지. 소소강(지금의 율천리에서 흘러내리는 고성천을 소소강이라 했음)에서 고성만 바다까지 뱃길이 있는 양 지도 위에 굵은 선으로 그어져 있으므로 왜장은 그 지도를 따라 소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겠지. 가다가 길이 없음을 알고 후퇴를 하고 있을 즈음에 이순신 함대가 들이닥치자 적들은 물러서자니 퇴로는 없고 나아가자니 이순신의 막상한 함대가 버티고 있으니 우왕좌왕하다가 전멸되었거든. 26척이나 되는 왜적의 대 함대를 깨뜨리는 숨은 주역은 월이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어찌 월이를 논개와 단순비교를 하겠는가 말일세.”

“야! 이거 처음 듣는 소린데. 당항포해전이 그렇게 시작된 전투였다니!”

태상은 아연 놀랍다는 표정이다.

 

 

 

“논개는 제2차 진주성 전투 때인 1593년 6월에 죽었지만 월이는 그보다 이른 1592년 6월 당항포해전 직후에 적장의 칼에 무참히 베어졌다. 논개보다 앞서 죽었고 그 죽음 자체도 비참했지 결론적으로 논개보다 더 거룩하고 더 충절하다고 볼 수밖에 없어.”

- 정해룡《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에서 19∼23쪽

 

이것이 고성사회에서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의기 월이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모든 지자체에서는 없는 것도 만들어서 축제를 하느니, 기념관을 짓느니 야단법석을 떠는데 이제 고성 땅에 오랫동안 묻혀있던 ‘월이’라는 좋은 관광상품을 발굴해 놓았다.

어떤가. 고성인들이여! 이 야야기를 듣고 그냥 흘릴 것인가. 묻어들 것인가. 아니면 이제다고 월이를 기리는 ‘월이기념관’이라도 짓고 ‘월이축제’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월이 둘레길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각광받는 길이 둘레길이나 올레길이다. 둘레길은 주로 산의 둘레를 따라 일주하는 여행길이고 올레길은 제주도의 걷기 여행 코스다.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좁은 골목이란 뜻인데 통상 큰길에서 집의 대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을 말함이다. 둘 다 도보로 여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리산, 북한산 등에는 둘레길이 조성돼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고성에도 이런 둘레길 하나 조성할 멋진 코스가 있다. 그곳은 거류산이나 벽방산이 아닌 ‘월이’와 관련된 ‘속싯개’ 일대다.

 

 

 

고성천에서 흘러든 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 그 일대가 바로 임진왜란 때 월이가 그린 지도에 속아 일본군이 대패한 속싯개다. 그곳 바다를 막아 간척사업을 한 이는 김정실 전 국회의원이다. 이곳을 막아 간척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 당시 왜장이 고성만 바다로 빠지기 위해 거슬러 올랐던 '소소강’ 그대로의 지형이었을지도 모른다.

간사지에는 우포늪처럼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란다. 그중에서 갈대는 군락을 이루어 철새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 준다.

이곳은 나고 드는 새나 식물을 조사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 갈대가 무성한 강변을 따라 연인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데이트 공간이다. 때론 가족끼리 나들이를 와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이곳은 강둑을 따라 걸으며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고성의 비경이다. 한때 TV광고에서 유행한 것처럼 “이곳은 사색하기 딱이다! 딱인 곳이다”라고 흉내를 낼 수가 있을 정도로 고즈넉한 나만의 공간이기도 한 곳이다.

또한 이곳은 변산반도에 있는 채석강처럼 강변 산은 비바람에 깎여 층층이 쌓인 돌이 마치 책을 쌓아 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 그 당시에도 강변은 이 모양이었을 것이고 이순신 함대에 쫓긴 왜군은 이 길을 따라 고성읍 쪽으로 도망을 갔을 것이다. 정해룡의 소설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묘사돼 있다.

 

허지월은 그들을 고성읍으로 안내했다. 간사지에서 낙정마을을 지나 두호리로 가는 길은 환상적이었다. 그들은 잠시 차에서 내려 소소강(고성천) 하구에 형성된 이 목가적인 풍경에 놀라 탄성을 질렀다. 습지가 잘 발달돼 갈대가 군락을 이루었고 새떼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어 주고 있었다.

이순신에게 패한 왜군들이 이 길을 따라 고성읍성으로 갔을 것이다. 그들도 그 길을 거쳐 읍으로 들어왔다.

- 정해룡《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에서, 273쪽

 

 

 

간사지에서 낙정마을을 돌아 갈대가 무성한 강변을 지나 두호마을 근처에서 고성천을 가로질러 저 건너 거산리 일대 강변에서 다시 간사지까지의 둘레길을 만들면 환상적인 길이 될 것이다. 거리는 약 4.1km 정도로 수변의 경관을 감상하면서 걷기에 더없이 좋은 코스다.

간사지에서 낙정마을과 두호마을까지는 이왕에 난 길이 있다. 반대편의 가려리와 거산리에도 길이 나 있다. 단지 고성천을 가로지르는 목가적인 다리만 만들면 될 것이다. 여기서 목가적인 다리라고 한 것은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것이 아닌, 옛 우리네 전통방식에 의한 다리를 말함인데 큰 비에 떠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환경파괴와 환경보호라는 이유로 환경단체의 반대가 따를 것이라 하나 그 길은 단순히 환경파괴와 환경보호 측면 이전에 역사의 흔적을 찾는 길이고 역사를 복원하는 길이고 월이와 관련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길이다.

 

 

 

월이가 만든 가짜 지도로 인해 왜의 함대 26척이 그 길로 접어들었다가 길이 없음을 알고 뒤로 후퇴하는 순간 뒤따라온 이순신함대에게 전멸을 당한 이곳 속싯개 바다야말로 역사의 현장이고 향토사의 살아 있는 교육장이 아닌가.

그 길은 순전히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관찰하고 보호하는 길이고 환경의 중요함도 일깨우는 길이자 잃어버린 지역의 향토사를 찾는 길이기도 하다.

월이 둘레길 군데군데 새를 관찰하는 탐조전망대와 쉼터를 만들고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소설에 나오는 속싯개에 관련 글을 새겨놓으면 전국에서 사랑받는 둘레길이 될 것이다.

 

 

 

<간사지 둑길>

 

-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 -

 

이 책은 고성문화원에서 고성군의 지원을 받아 정해룡 작가의 집필로 발간된 고성의 문화와 발자취에 대한 책이며, 고성문화원의 협조를 받아 순차적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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