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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의 정상 비로봉을 향하여 순백의 세계를 향하는 발걸음이 마치 순례단 같다. |
ⓒ 안준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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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의 풍광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까? 가령, 마음에 어둠이 가득했던 사람이 순백의 눈부신 설원에 잠시 서 있었다고 해서 그 영혼이 금세 환해질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으로 마음이 환해지는 일시적인 현상이야 흔히 경험하는 일이 아닌가.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일시적인 반응이 아니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평생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살았던 한 사내가 우연한 기회에 겨울 산행에 나섰다가 온통 눈꽃으로 수놓인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세상을 만나 문득 자신의 삶을 돌이키게 된다든지, 그 후 더러움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된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있을 법한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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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소백산 소백산의 아름다움은 소백산만의 것이 아니다. 백리 쯤 떨어져 있다는 태백산 등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이 더하여 더욱 빛을 발한다. |
ⓒ 안준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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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 사내가 오른 산이 겨울 소백산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말솜씨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내가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 누구라도 겨울 소백산에 올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상고대를 목도하거나 눈꽃터널을 지나다보면 불현듯 삶을 바꾸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겨울 소백산은 눈꽃터널과 상고대로 유명하다. 상고대란 해발 1000미터 이상 되는 지대에 낮은 구름이 산에 걸치면서 지나갈 때 나뭇가지나 바위 등 물체에 수분이 응결되면서 얼어붙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셈이다. 다만, 그 모양이 눈처럼 하얗게 생겨서 눈꽃이라고 부는 것뿐이다.
그런 상고대와는 달리 하늘에서 내린 눈이 가지에 얼어붙어 마치 새하얀 눈꽃이 피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물론 그것도 사람들은 눈꽃이라 부른다. 아니, 그것이 진짜 눈꽃이다. 하지만 나 같은 보통사람의 눈으로는 그것이 진짜 눈꽃인지, 그냥 눈꽃이라 부르는 상고대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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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 상고대, 혹은 눈꽃 산호초 같기도 하고 사슴 뿔 같기도 한 저것을 상고대라고 부르기도 하고 눈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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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 상고대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상고대가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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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나무 잔가지 끝에 서리처럼 하얗게 달라붙어, 마치 별이 밤하늘을 수놓듯 파란 하늘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상고대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좀 더 굵은 모습을 띄고 있어 마치 바다 속 산호초처럼 보이는 하얀 눈꽃이 그냥 눈꽃인지 상고대인지 나로서는 알 재간이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눈꽃이든 상고대이든 그 모양과 빛깔이 심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태를 목도한 것만으로도 삶을 돌이키고 싶을 만큼 말이다. 이렇듯 때로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만으로도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될 때가 있다. 이것이 자연만이 지니는 치유의 힘이요, 매력이다.
1월 3일 아침 9시, 산을 좋아하는 ‘올뫼산악회’ 12명은 1박 2일의 일정으로 소백산을 찾았다. 겨울 소백산의 백미인 눈꽃과 상고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어께너머로나마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15인승 봉고차에 몸을 싣고 전남 순천에서 도경계를 세 번이나 넘어 숙박지인 소백산 옥녀봉 휴양림을 향해 달리는 우리의 마음이 마냥 들뜨거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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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소백산 멀리 산 정상에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통상 눈꽃이라고 불리우는 상고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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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소백산의 아름다운 눈꽃 못지않게 유명한 이른바 ‘칼바람’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소백산의 눈꽃이나 상고대가 아름다운 것은 지형적으로 북서풍의 매서운 바람을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의 이유가 곧 위험의 이유가 되는 셈이다. 어쨌거나 그 악명 높은(?) 칼바람을 피할 길은 없다고 해도 칼날보다는 칼등에 베이는 것이 백번 낫겠다 싶어 우리 일행은 바람의 방향을 예견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소백산 등반 코스는 여러 갈레이다. 백두대간 제1코스는 죽령-제2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국망봉-늦은막이-마당치-고치령으로 장장 24.9km이다. 일반 사람들이 하루에 주파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는 희방사 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연화봉(천문대)과 제1연화봉(1394m)을 지나 주봉인 비로봉(1439m)으로 향하는 비교적 짧은 코스를 잡았다. 그래도 약 7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숙소인 옥녀봉 휴양림을 빠져나와 차로 이동하여 산을 타기 시작한 것은 아침 7시 15경이었다. 이른 시각이라서인지 직원들이 보이지 않는(그래서 반가운) 희방사 매표소를 무사통과한 후 높이 28미터로 내륙지역에서는 가장 큰 폭포라는 희방폭포에 당도하자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침 찬 기운 탓인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아파오면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소백산보다 한 수 위인 지리산이나 한라산을 오늘 때도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칼바람을 맞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점령당한 것을 보면 소백산 칼바람이 대단하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가파른 오르막길이 잠시 주춤하는 곳에서 두 번째 휴식을 취하는데 그곳이 ‘희방깔딱재’였다. 이곳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숨을 깔딱였으면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싶었다. 그 재미있는 이름 덕분에 우리 일행은 모처럼 긴장감을 풀고 한바탕 웃음꽃을 피울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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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천문대 국대 최대 우주 관측소인 국립천문대가 보인다. 겨울 소백산에서는 천문대가 아니라도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눈꽃을 통해 우주를 볼 수 있다. |
ⓒ 안준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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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깔딱재에서 우리나라 최대의 국립천문대가 있는 연화봉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소백산의 아름다움은 소백산 자체만의 것은 아니었다. 고승은 고승끼리 알아본다고 했던가. 높은 곳으로 발을 내딛을수록 빼어난 주변 산들의 경관이 우리를 압도했다. 저것이 우리나라 산 맞아? 이런 생각이 불쑥 들 정도였다. 마치 신기루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드디어 칼바람이 시작된다는 제1연화봉에 당도했다. 산행을 시작한 지 정확히 3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런데 어찌된 조화인지 비로봉이 손에 잡힐 듯 환히 내다보이는 제1연화봉에 당도해도 칼바람은 고사하고 아예 바람이 불지 않았다. 명색이 겨울철인데 동네 뒷산에 올라도 이러지는 않을 성싶었다. 신의 조화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그렇다고 허망한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황홀감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눈에 띄기 시작한 상고대가 너무 예쁘고 아름다웠던 것이다. 나뭇가지에 눈처럼 하얗게 붙어 있는 상고대와 그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쪽빛 하늘을 마음껏 우러르며 폐부 깊숙이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만약 능선에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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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꽃터널 눈꽃터널을 지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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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눈꽃 터널은 길고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처음 상고대가 보이기 시작한 제1연화봉에서 주봉인 비로봉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내달아도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물론 우리에겐 걸음을 빨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지만.
우리 ‘올뫼산악회’ 일행은 마치 천상에 놀러온 사슴이나 노루새끼들 마냥 방방 뛰며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누구랄 것도 없이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마치 전광석화처럼 한 가지 생각이 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이 주신 이런 기적 같은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고도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내 욕심이나 챙기며 살아서는 안 되리라. 그것은 이런 풍경을 주신 분에 대한 예의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다.’
영국의 시인 <죤 키츠>의 유명한 시구가 떠오른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미(美)는 진실이요, 진실은 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도 아름다운 풍광만으로 사람이 진실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고 느끼는 감각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 테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 겨울 소백산에서 만난 아름다움을 어찌 감각적인 아름다움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눈으로 봐야 마음으로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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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찬 칼바람에 얼어붙은 이정표와 시인의 마을 시인의 마을은 칼바람을 잠시 피해가는 대피소 역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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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곳에 ‘시인의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시인들이 쓴 아름다운 시를 감상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바람을 잠시 피해가는 대피소로서의 역할이 더 클 것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 미리 준비해간 간단한 점심을 챙겨먹고 산행을 시작한지 5시간만인 12시 18분에 정상인 비로봉에 우뚝 섰다. 상고대와 눈꽃을 즐기느라 예정보다 시간이 조금 늦어졌지만 마음 쓸 일이 아니었다.
오후 2시가 조금 못 되어 드디어 산행이 끝났다. 여행 마지막 코스인 소백산 풍기온천에 가기 위해 차에 몸을 싣고 삼가매표소를 돌아 나오다 보니 멀리 소백산 정상에 흰 머리띠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우리가 걸었던 눈꽃 터널이었다. 가만 손을 들어 재보니 한 뼘이 될까 말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