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그곳에서
꽃이 피었습니다.
화사한 겨울꽃이 피었습니다.
바람이 잠든 틈을 타서
소록소록 아름다운 순백의 눈꽃이 피었습니다.
나의 작은 미동에 우수수 떨어질까 두려워
숨소리 죽여가며 사뿐사뿐 꽃밭을 거닐었습니다.
여러가지 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지 않아도
단하나의 색으로도 화사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을
나의 어리석음은 오늘에야 배웠습니다.
지리에 들때면 늘 마음부터 설레입니다.
오늘은 무슨 풍광으로 다가올까
오늘은 어떤 침묵으로 말해올까
어둠이 짙누른 이른 새벽
중산리 탐방안내소를 지나며 오늘의 걸음은 시작됩니다.
내리는 눈속에서도 먼저간 이의 흔적이 나를 인도하고
나의 걸음 또한 따라오는 이의 이정표가 됩니다
칼바위를 지나 고도를 높일수록
어둠을 휘감으며 몰아치는 눈발에
멀리서 전해오는 바람소리에 마음은 약해만집니다.
천왕에 갈 수 있을까?
법계사에 이르러서야 암흑은 자리를 내어주고
공간에서 건너온 희뿌연 빛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밤새 피웠던 겨울꽃도 자태를 드러내고
새하얀 설화로 하늘나라 정원을 단장합니다.
이세상 어디에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보이는 곳이 꽃이요
시선 머무는 곳이 행복이 머무는 곳입니다.
고요하지만 적막하지 않고
하나의 색으로 혼잡하지 않으면서도
간결하게 채색된 그리하여 더욱 빛나는 축복의 땅 화원에
가슴에 담아온 이름 두 글자를 새겨넣었습니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얼어붙은 천왕샘을 지나고 하이얀 개선문을 통과하며
조금씩 이성을 잃어가던 나의 모습은
여름날의 수 많은 땀방울이 스며있는
깔딱고개를 엉금엉금 올라선 후에는
또 다른 풍광에 몸부림을 쳐야했습니다.
북사면을 타고 올라온 바람에
바위도 상고대란 이름으로 서리꽃을 피웠습니다.
지난밤이 얼마나 매서웠을까?
기온이 내려갈수록, 바람이 강할수록
서리꽃은 더욱 날카롭고 영롱하다는데
네 모습이 그러하구나.
바람아! 내 육신에도 꽃을 피워다오.
차디찬 바위에 피운 서걱이는 석화의 모습으로..
앙상한 나무가지에 날카롭게 칼날세운 바람서리꽃으로..
자라남이 두려워 납짝 엎드린 풀포기 뒤엎은 눈송이의 꽃으로..
그리하여
혼자라고 느껴질 때 쓸쓸하지 않도록
희망이 사라질 때 낙담하지 않도록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포기하지 않도록
세찬 바람불어 내 육신에도 바람서리꽃을 피워다오.
천왕의 눈보라는 상봉의 바람은
오랜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운 반야의 모습도
꿈틀대는 황금능선의 모습도
잡힐듯 서 있는 중봉의 모습도 볼 수 없었지만
동토의 땅에서 모진 바람 견뎌가며
꽃을 피우는 구상나무의 연정이
오히려 서정으로 다가옵니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삭풍에도 굴하지 않는 제석봉의 처연한 고사목이 숭고합니다.
지리의 하이얀 눈꽃이
서늘한 바람서리꽃이
몸 속 깊숙히 파고드는 찬 바람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얼어붙은 땅에서도 생명의 물줄기는 이어지듯이
내 마음 속에도 희망의 줄기는 이어집니다.
연속된 시간의 흐름이 누군가에 의해 잘리워졌습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란 개념으로
작년과 올해 그리고 새해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 또한 지난해를 돌아보며
추악하고 힘들었던 일은 망각의 힘으로 잊어버리고
아름답고 고귀한 일들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간직합니다.
또 한해를 보내며
함께할 산친구가 있어 행복합니다.
행선지 : 중산리-법계사-천왕봉-장터목-중산리 지리산을 그리워하는 산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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