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 갈등에서 권력 투쟁으로

공천 갈등에서 권력 투쟁으로

기사입력 2008-03-24 02:42 |최종수정2008-03-24 11:50

[중앙일보 신용호.정강현.남궁욱] 숨 가쁜 하루였다. 오후 2시 박근혜 전 대표가 총선 공천이 잘못됐다며 당 대표와 지도부의 책임론을 거론했다. 두 시간 뒤 한나라당의 공천 후보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을 지목해 “물러나라”는 집단 성명을 발표했다. 세 시간 뒤 이번엔 강재섭 대표가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배수진으로 박 전 대표를 맞받아쳤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밤 늦게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을 만났다. 총선을 불과 17일 남겨둔 3월 23일 하루 동안에 한나라당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10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뤄낸 한나라당이 거대한 권력 투쟁의 회오리로 빨려 들고 있다. 겉으로 내건 건 공천이다. 그러나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건 새 정부 인선과 공천 등을 둘러싼 여권 핵심들의 죽기 살기식 파워게임이다.

박근혜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강재섭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23일 “당 공천 과정을 보고 좌절과 부끄러움을 느꼈다”며 “‘믿고 맡겨 달라’는 당 대표(강재섭)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천 파동에 대해 당 대표와 지도부가 책임져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특히 “경선에서 지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권력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등의 발언으로 이명박 대통령도 간접 비판했다.

박 전 대표는 “당의 공천이 이렇게 잘못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공정하고 투명하게 처리했어야 할 의무가 있는 당 대표와 지도부가 정치 개혁에 대한 철학과 의지가 없고, 무능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나 “한나라당을 다시 꼭 바로잡겠다. 그게 국민과 당을 위해 내가 할 일이고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해 탈당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공천에서 탈락, 탈당한 친박 성향 의원들을 향해선 “내가 그분들을 지원할 수 없다. 억울한 일을 당한 분들이기 때문에 잘되기를 바란다. 건투해 달라”며 사실상 지지 의사를 밝혔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박 전 대표의 기자회견 뒤 “총선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질 각오가 돼 있다”며 “이번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여의도 당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당 대표인 제가 선거 결과에 따라 모두 책임지겠다. 더 이상 시비하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강 대표는 “앞으로도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는 당 대표로서의 긍지를 지킬 것”이라며 당 대표직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 “당의 어떤 실세도 공심위원들을 마구잡이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라며 “독자기구의 결정에 대해 그렇게 원칙을 강조하는 분들이 비난하지 말라”고 계파 공천 주장을 일축했다.

남궁욱 기자

이재오, MB 만나 당 수습안 건의한 듯

이상득 “공천 관여 안 해 … 계속 간다”

한나라 55명 “이상득 출마 말라”

이재오 한나라당 전 최고위원이 23일 오후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 자리에서 한나라당의 공천 갈등과 관련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자신의 총선 동반 불출마를 건의한 것으로 안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이 전 최고위원의 건의에 대해 이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측근은 “당내 현안을 두루 논의했을 뿐 동반 불출마에 대해 건의하지도 않았고 그런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이에 앞서 오후 4시쯤 심재철·진수희·차명진·박찬숙 의원 등 한나라당 4·9 총선 후보 55명은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총선 불출마’와 국정 관여 행위 중지를 요구하는 집단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중 19명은 기자회견에서 “서민을 외면한 정책 혼선, 잘못된 인사, 의미가 퇴색된 개혁 공천에 대해 청와대와 당 지도부가 국민에 사과해야 한다”며 “인사를 잘못한 청와대 관계자에게 책임을 묻고 사퇴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대통령의 측근인 정두언 의원은 회견에 불참했으나 성명서엔 서명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김덕룡 의원도 보도자료에서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이 부의장의 공천 반납이 사태 수습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상득 부의장은 이날 밤 포항에서 기자와 만나 “공천에 개입한 일이 없는데 공천이 잘못된 것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납득이 되면 받아들이지만 납득이 안 된다”고 말했다. 또 “내 공천은 대통령과 관계없이 공심위에 이틀간 시달려서 받은 것”이라며 “이상득 공천이 잘못됐으면 지역구인 포항 시민이 판단할 문제이며 계속 간다”라고 말했다.

이 부의장은 “국정에서 손을 떼라고 하는데 내가 국정에 무슨 관여를 했느냐”고도 반박했다. 다만 이 부의장은 “공천이 시끄럽긴 했다. 최종 책임은 대표에게 있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