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송달송 삶★

정선전씨와 전오륜 잊고있는 우리역사

별고을 동재 2007. 3. 21. 16:02
정선전씨와 전오륜 잊고있는 우리역사

2005/12/19 09:34

http://blog.naver.com/js1440/80020381773

정선아리랑에 담은 7賢의 충절
7명의 고려 충신 거칠현동에 은거 … 조선 왕조의 미움 사 후손들 출사 막혀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정선 읍내에 새로 마련된 아라리촌의 물레방앗간.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주기 임의 맛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나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구성진 정선아리랑의 한 가락이다. 정선아리랑의 유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두문동 72현과 만나게 된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한치(정선군 남면 유평리)마을에서 북쪽으로 7km쯤 가면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이 나온다. 첩첩산중이라 세상 등지고 살 만한 곳이다. 앞산 백이산은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가파르다.

이 산중에 고사리를 캐먹고 살던 고려 충신 7명이 있었다.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仲漢), 고천우(高天祐),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가 그들이다. 정선 땅에 강 좋고 계곡 좋고 풍광 좋은 곳이 많건만 하필 이 협소하고 험악한 산중에 들어와 살다니, 그들의 매서운 심사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정선은 전오륜 선조의 고향 땅

이들이 정선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전오륜과의 인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정선은 전오륜 선조의 고향 땅이다.

전오륜은 고려 말에 우상시(右常侍)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는 본향을 달리하는 18파 모든 전(全)씨의 시조인 백제 개국공신 전섭(全)의 후손이자, 신라 내물왕 때 백제 대광공주를 배행하고 신라에 들어가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해진 전선(全)의 후손으로, 정선 전씨의 파시조가 됐다. 전오륜은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을 거쳐 정선으로 오게 됐는데, 처음에는 정선 성마령에 머물다가 관리들에게 소재가 파악되자 더 깊은 거칠현동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나머지 6명은 정선과 특별한 인연이 없고, 정선에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도 알 수가 없다. 전오륜을 찾아갔다가 잠시 머물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이들은 거칠현동의 앞산을 백이산이라 이름 짓고 지냈다. 백이산은 주나라에 반대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은 형제 백이숙제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들은 정선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마음을 정선아리랑에 실어 읊기도 했다. 1983년에 두문동 72현에 속하는 최문한의 집안에서 공개한 자료에는, 거칠현동의 7현이 지었다는 ‘도원가곡(桃源歌曲)’이 실려 있다.

我羅理 啞肄 餓彛要 義朗 古稽露 懶慕艱多 (아라리 아라이 아나이요 아의랑 고계로 나모 간다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에 마련된 소공원(왼쪽).낙동리 서운산에 있는 전오륜의 묘소.

소리를 그저 한자로 옮겨놓은 것 같지만, “벙어리처럼 말을 삼가고 배고픔을 견디며 오로지 충의를 밝히자”는 비장한 의미를 담고 있는 가사다. ‘도원’은 고려 충렬왕 때 정선의 이름이었으니, 도원가곡은 정선가곡이나 다름없다. 이 가곡은 처음 공개될 때 큰 주목을 받았는데, 무엇보다도 정선아리랑의 존재를 고려 말까지 끌어올린 근거가 됐다.

7현 기리는 비석엔 그들의 한시 새겨져

현재 거칠현동 어귀에는 작은 공원이 마련돼 있는데, 이곳에는 7현을 기리는 비석과 사당 칠현사(七賢祠)가 세워져 있다. 또 이와 별도로 높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팔각형 비석의 한 면에는 ‘高麗遺臣七賢碑(고려 유신 칠현비)라 새겨져 있는데, 다른 7면에는 7현들의 한시가 한 편씩 새겨져 있다.

東來朝服在臣身/ 동쪽으로 올 때 가지고 온 조복으로 갈아입고
遙望松京哭滿巾/ 송도를 바라보니 애달파 눈물만 흐르네
唐虞世遠吾安適/ 요순성대 가버렸으니 어디서 머물리요
矯首西山繼絶塵/ 서산을 향하고 세상 인연을 끊네

채미헌(採薇軒) 전오륜의 시다. 이 시는 개성의 남동쪽에 있던 광덕산 부조현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머물던 상황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 동쪽을 정선 땅으로 생각해도 잘 어울린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칠현비와 칠현사가 세워진 곳은 거칠현동의 입구일 뿐이다. 거칠현동은 공원 안쪽 계곡으로 10리나 된다는데, 조금 걸어 들어가 보니 난파(難破)돼 있었다. 그곳엔 석회암 광산이 있었다. 골동품의 가치가 있는 문짝을 불쏘시개로 써버렸던 시절처럼, 역사문화자원이자 관광자원을 깨뜨리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정선에 살고 있는 정선 전씨들이 군청과 광산을 찾아가 항의해봤지만, 공사는 그치지 않고 있다. 아리랑 가락이 울려 퍼져야 할 곳에 발파음이 난무하니 패망한 고려의 참상을 보는 듯하다.

 

 

칠현비와 도원가곡비.

거칠현동에서 1km쯤 떨어진 낙동리 삼평역 철로변에 사는 전홍렬(78) 씨는 전오륜 할아버지 때문에 정선 전씨들이 600년 가난에 들었다고 했다. 이성계와 크게 원수를 져서 전주 이씨와는 혼인도 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크게 현달한 이도 없다고 했다. 고작해야 조선 선조 때 횡성현감을 지낸 전방경(全方慶)이 있는데, 그도 어찌나 과거에 낙방을 하던지 외갓집 성을 빌려 쓰고서야 급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직으로 들어가려다가 전(全)씨라는 것이 발각돼 파직을 당하고 말았다.

전오륜은 거칠현동에서 30년가량 머물다가 말년에 경남 합천의 아들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합천은 그가 군수를 지냈고, 아들 전맹겸(全孟謙) 또한 군수를 지냈던 고을이다. 전오륜은 합천에 묻혔는데, 묘지가 합천댐 수몰지가 되면서 1986년 정선군 거칠현동의 서운산 자락으로 옮겨졌다. 이제 다시 정선의 첩첩 산자락이 전오륜의 육신을 그 옛날처럼 첩첩 에워싸고 있다

 주간동아 2005.12.13 514 호 (p 50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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