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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읍내에 새로 마련된 아라리촌의 물레방앗간.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주기 임의 맛만 같다면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나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구성진 정선아리랑의 한 가락이다. 정선아리랑의 유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두문동 72현과 만나게 된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한치(정선군 남면 유평리)마을에서 북쪽으로 7km쯤 가면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이 나온다. 첩첩산중이라 세상 등지고 살 만한 곳이다. 앞산 백이산은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가파르다.
이 산중에 고사리를 캐먹고 살던 고려 충신 7명이 있었다.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仲漢), 고천우(高天祐),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가 그들이다. 정선 땅에 강 좋고 계곡 좋고 풍광 좋은 곳이 많건만 하필 이 협소하고 험악한 산중에 들어와 살다니, 그들의 매서운 심사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정선은 전오륜 선조의 고향 땅
이들이 정선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전오륜과의 인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정선은 전오륜 선조의 고향 땅이다.
전오륜은 고려 말에 우상시(右常侍)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는 본향을 달리하는 18파 모든 전(全)씨의 시조인 백제 개국공신 전섭(全)의 후손이자, 신라 내물왕 때 백제 대광공주를 배행하고 신라에 들어가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해진 전선(全)의 후손으로, 정선 전씨의 파시조가 됐다. 전오륜은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을 거쳐 정선으로 오게 됐는데, 처음에는 정선 성마령에 머물다가 관리들에게 소재가 파악되자 더 깊은 거칠현동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나머지 6명은 정선과 특별한 인연이 없고, 정선에 얼마 동안 머물렀는지도 알 수가 없다. 전오륜을 찾아갔다가 잠시 머물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이들은 거칠현동의 앞산을 백이산이라 이름 짓고 지냈다. 백이산은 주나라에 반대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은 형제 백이숙제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들은 정선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마음을 정선아리랑에 실어 읊기도 했다. 1983년에 두문동 72현에 속하는 최문한의 집안에서 공개한 자료에는, 거칠현동의 7현이 지었다는 ‘도원가곡(桃源歌曲)’이 실려 있다.
我羅理 啞肄 餓彛要 義朗 古稽露 懶慕艱多 (아라리 아라이 아나이요 아의랑 고계로 나모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