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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부자의 양대산맥 경주 최부자&청송 심부자

별고을 동재 2013. 2. 14. 19:59

조선시대 부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영남 부자의 양대산맥 '경주 최부자&청송 심부자' 조선시대 영남 최고 부자로 꼽히던 경주 최부자와 청송 심부자를 찾아 나섰다. 300년 이상 '만석지기'의 부를 이어온 부잣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고택에서의 고즈넉한 하룻밤은 보너스다.



송정고택 뒷산에서 바라본 덕천마을 전경 송정고택 뒷산에서 바라본 덕천마을 전경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내로라는 부자를 '만석꾼'이라 했다. 만석꾼이라. 곡식 만 섬 가량 거둘만한 논밭을 가진 부자를 빗댄 말이다. 석과 섬은 같은 단위로 보면 된다. 꼭 만석이 아니더라도 그만큼 부자다, 라는 뜻이다. 현금 제일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응당 궁금해진다. 지금으로 따지면 얼마만큼의 부자일까. 계산하기 쉽게 쌀 한 섬을 한 가마니로 치자. 한 가마니는 80kg. 현재 쌀 시세를 대략 20kg에 5만원으로 잡으면 한 가마니는 20만원. 한 섬에 20만원이니 만 섬이면, 20억 원이다. 쌀 한 섬(180리터)을 두 가마니로 친다면 값어치는 더욱 높아진다. 즉 만석꾼을 현대에서 환산해보면 최하 연수입 20억 원 이상의 부자를 뜻한다. 만석꾼이 무에 그리 부자라고, 살짝 얕봤던 마음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진다.

만석꾼, 연봉으로 따지자면 많게는 지금 직장인들의 100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게다가 배불리 먹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임을 감안한다면 '만석꾼'은 굉장한 부자였을 것이다. 감히 비교하자면 지금의 대기업 총수쯤 되지 않을까.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옛날 부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시대 영남을 대표하던 부호, 경주 최부자와 청송 심부자가 살던 고택에 들러 당시 조선 최고 부자로 꼽히던 이들의 생활공간을 살펴보면 어떨까.



경주 최부자 머물던 경주교동 최씨고택

경주 최부잣집 솟을대문과 왼편으로 자리한 가양주, 교동법주 사랑채에서 솟을대문으로 바라본 최부잣집 내부 [왼쪽]솟을대문은 대갓집의 위용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경주 최부잣집 솟을대문은 낮고 수수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왼편으로 경주 최부잣집에서 대대로 빚어 온 가양주, 교동법주가 자리한다.
[오른쪽]사랑채에서 솟을대문으로 바라본 최부잣집 내부


경주를 신라의 수도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천년 신라의 유일한 수도였던 만큼 경주와 신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도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주가 신라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천년 신라 이후 새로운 천년을 '고려'나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에 안겨 살아왔으니 알고 보면 경주는 '신라'보다 그 외의 시대에 속해 있던 시간이 더 길다. 물론 한 왕조가 유지되던 내내 '왕경'을 차지했던 경주의 아우라는 다른 시대의 평범한 고을이던 '경주'와는 분명 차이는 있다.

오늘 살펴볼 경주는 조선시대의 흔적을 품은 경주교동 최씨고택이다. 본명보다 '경주 최부잣집'으로 더 유명한 공간이다. 청송 심부자와 함께 영남 만석꾼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경주 최부잣집은 '300여년 간 12대를 이어간 부자'라고도 유명하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경주 교동으로 가보자.

경주 최씨의 종가, 경주 최부잣집이 위치한 공간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기거했던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알려진다. 1700년 경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12대에 걸쳐 300여 년간 부를 유지했다. 아흔아홉칸으로 지어졌으나 1970년 사랑채와 별당이 불에 타 버렸다. 그래도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에서 여러 대에 걸쳐 빚어온 '경주 교동법주'를 비롯해 경주 향교, 2013년 1월 가오픈한 경주 교촌마을 등이 근처에 자리한다. 교동은 최부잣집 뿐 아니라 신라의 국학과 고려, 조선의 향교를 품은 공간으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의 중심지였다.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 경주 최부잣집 안채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왼쪽)와 안채(오른쪽). 사랑채는 바깥양반들의, 안채는 아녀자들의 거처였다. 사랑채는 지난 2006년 복원한 것. 300여 년간 12대를 이어온 최부잣집 창고 최부잣집 창고 설명하는 해설사 300여 년간 12대를 이어온 최부잣집 창고.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목조 곳간으로 알려진다. 곳간 앞에 적힌 '육훈'이 오랜 시간 부를 누릴 수 있던 이유를 보여준다


경주 최부잣집에 들어서면 먼저 '최부잣집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는 '육훈(六訓)'이 눈에 띈다. 삼대가 가기 어렵다는 부자가 12대를 이어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오죽했으면 최부잣집 소작농이 되려는 이들이 줄을 이었을까. 그들은 대를 이어 가훈을 지키며 부를 쌓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그런데 어째서 최부자는 12대로 막을 내렸을까. 잠시 전해지는 최부잣집 이야기를 들어보자.


바깥을 엿볼 수 있는 안채 담벼락의 구멍 최부잣집 큰사랑채 뒤편에 자리한 안채와 사당 아녀자들은 안채 담벼락의 구멍으로 바깥을 엿보았다(왼쪽) / 최부잣집 큰사랑채 뒤편으로 안채와 사당이 자리한다. 개방되지 않아 겉에서만 볼 수 있다(오른쪽) 경주 최씨 집안의 가양주로 알려진 교동법주 경주 최부잣집이 자리한 교동에 들어선 경주 교촌마을 [왼쪽]경주 최씨 집안의 가양주로 알려진 교동법주. 최부잣집 바로 옆에 자리한다
[오른쪽]경주 최부잣집이 자리한 교동에 들어선 경주 교촌마을. 최부잣집과 교동법주, 경주 향교 등과 함께 둘러보기 좋다


최부자의 1대는 최진립이다. 2대 최동량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큰 땅을 구입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국선은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쌀을 빌려간 것을 못 갚자 아들 앞에서 담보문서를 모두 없애고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푸짐하게 나눠준다. 배고픈 보릿고개 때에는 100석의 쌀을 베푼다. '사방 백리에 굶어죽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최부잣집의 선행 덕분이었을까. 활빈당의 불길 속에서도 최부잣집은 살아남는다. 하지만 12대 최준에 이르러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신념으로 독립자금 마련에 재산을 내 놓는다. 광복 후에는 교육 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한다. 최부자가 12대, 300여년으로 막을 내린 이유다.

아쉽지만 경주 최부잣집에서는 숙박이 불가능하다. 국악체험을 비롯해 각종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 경주 교촌마을에서의 숙박 여부도 아직 확실치 않다. 일단,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커다란 곳간을 가득 채운 곡식을 아낌없이 배고픈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진다. 지금, 후손들이 사는 공간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여담으로 하나 더하자면 마지막 최부자 최준 선생의 동생 최윤 선생은 다음 여행지인 청송 심부잣집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현재 전통문화진흥원의 김수현 이사장은 그들의 손주 며느리다. 경주에서 꼭 고택체험을 하고 싶다면 최부잣집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자리한 배반동의 수오재(054-748-1310)를 이용하면 된다.



청송 심부자 머물던 송소고택…숙박과 관찰 모두 가능

청송 심부자가 머물던 공간은 '송소고택'으로 더 유명하다. 한번쯤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지난 2002년부터 고택 체험시설로 개방하면서 찾은 이들도, 찾는 이들도 많다. 2011년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안동IC에서 35번 국도와 914번 지방도를 타고 1시간 반은 달려야 닿는 거리다. 청송으로 향하는 길, 이 고장이 영남의 산골 오지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이런 산골에 어찌 그런 부호가 살았을까, 절로 궁금해진다.


아랫목을 따뜻하게 채워줄 아궁이 굴뚝을 타고 올라오는 연기 아랫목을 따뜻하게 채워줄 아궁이 불이 굴뚝을 타고 온 집안을 소독한다 턱이 거의 없는 솟을대문 대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마주하는 큰사랑채 달구지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는 턱이 거의 없는 솟을대문은 청송 심부잣집의 '부'를 엿볼 수 있는 첫 번째 대목이다. 대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큰사랑채와 마주한다


청송 심부잣집은 파천면 덕천마을에 자리한다. 덕분에 '덕천동 심부잣집'으로도 불린다. 송소고택 뿐 아니라 송정고택·찰방공종택 등 여러 고택이 보존되어 있어 송정고택 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고택들이 운치있게 펼쳐진다. 덕분인지 덕천마을은 2011년 슬로시티로 등재되었다. 청송 심부잣집은 심처대부터 1960년대까지 9대에 걸쳐 2만석꾼을 배출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8도 어디를 가도 심부자네 땅이 있을 정도였다니 '조선판 해가 지지 않는 집안'이다. 청송 심부자는 조선시대, 내로라는 명문가 '청송 심씨'다. 조선왕조 내내 정승 13명, 왕비 3명, 부마 4명을 배출했다.

자, 이제 그 유명한 심부자가 대를 이어온 송소고택을 살펴보자. 송소고택은 조선시대, 영조 때 만석꾼인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1880년(고종 17년) 즈음 지었다. 강력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는 법도에 따라 궁궐을 제외한 사가는 아흔아홉칸 이하로 크기를 제한했다. 아흔아홉칸에 기둥만 하나 더해지면 궁궐과 진배없으니 아흔아홉칸 저택에 산다는 것은 그만큼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석할 수 있다. 송소고택이 아흔아홉칸이다. 사가에서 허용된 가장 큰 집인 것.


장독대가 채워진 안채의 안 대나무숲으로 채워진 안채 뒤 안채의 안은 장독대가 밖은 담벼락과 안채 뒤의 대나무숲으로 채워졌다. 대나무는 특유의 서걱거리는 소리로 침입자를 잡아냈다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향하는 마당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는 구멍으로 엿보는 여행객 남녀칠세부동석, 조선시대 유교사상은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향하는 마당에 '헛담'을 자리하게 했고 안채 담벼락에 '구멍'을 내게 했다. 아녀자들은 헛담에 몸을 숨기고 대문을 드나들었고 구멍으로 바깥 구경을 했다


송소고택의 시작점, 높게 솟은 솟을대문이 대갓집의 위용을 자랑한다. 행랑아범이나 길손이 머물던 행랑채를 거쳐 헛담이 이어진다. 큰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지은 담으로 안채에 기거하는 아녀자들이 대문을 드나들 때 사랑채에서 잘 보이지 않게 일부러 만든 담이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사회, 조선시대 여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청송 심부잣집 사랑채에서 바라본 솟을대문 청송 심부잣집 사랑채에서 바라본 솟을대문 사랑채와 안채를 잇던 툇마루 시집갈 나이의 딸이 머물던 별당 사랑채와 안채를 잇던 툇마루(왼쪽)와 시집갈 나이의 딸이 머물던 별당(오른쪽)


안채에서는 안주인과 아이들이 머물렀다. 큰사랑채에는 바깥양반이 머물렀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머물던 공간의 마루 높이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동하기 위한 고마운 수단인 툇마루 이야기에 '에헴' 거리던 양반들의 헛기침이 섞여 쑥스러운 웃음이 난다. 유교사회였던 당시 상황이 그려진다. 안채 담장에 뚫린 작은 구멍도 한몫 더한다. 아녀자들을 위한 '숨통'같은 구멍이다. 이를 통해 바깥세상 구경을 했다. 사랑채 옆으로 난 쪽문을 지나자 별당이 나온다. 시집 갈 때가 된 딸이 머물던 공간이다.

날이 춥긴 하지만 송소고택을 둘러보고 나면 절로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꿈꾸게 된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채를 보고 안채를 돌아 별당으로 한 바퀴 돌아보니 조선시대 최고 부자의 아흔아홉칸 집이 한눈에 그려진다. 잠시 당시 부자가 된 것 마냥 상상해보는 건 보너스다. 숙박을 하지 않아도 고택 구경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