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그가 진짜
'장군의 아들'인지의 여부에 대한 논란"
김두한
<월간 말> 2003년 5월호에는 김성환 기자의 "'장군의 아들'이 넘나드는 끝없는 거짓말의 경계선"이라는 제목의 발굴기사가 수록되었다.
여기에는 그 당시 인기드라마 <야인시대>를 통해 표출된 김두한의 허상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가 진짜 '장군의 아들'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애당초 '장군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허상조차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므로······.
아래는 그 글의 일부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사의 결론은 '장군의 아들은 맞다'는 것이었다. '장군의 아들이 맞다'라기 보다는······).
실소를 금치 못할 거짓말들
그가 실제로는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얘기는 진작부터 제기돼 왔다. 지금도 '의송 김두한' 홈페이지와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사이트는 물론 드라마를 제작한 방송국 사이트 게시판에 그가 왜 장군의 아들이 아닌지 조목조목 지적하는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여기에 영화 <장군의 아들> 1편 시나리오에 관계한 것으로 알려진 도올 김용옥은 그의 저서 <도올세설>에서
"내가 김두한에 관해 출간된 도서를 다 훑어보고 난 후에 내린 하드 팩트(hard fact)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그는 개성에서 자라난 부모를 모르는 고아다. 열 살 때 서울로 내려와서 거지노릇을 하다가 왕초라는 거지대장에게 붙들려 장차구다리(청계천) 밑 거지소굴에서 컸다. (중략) 다시 말해서 그가 장차구다리 밑의 거지에서 종로 일대를 제패하는 깡패두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픽션과는 전혀 무관한 사태이며, 김두한 자신에게도 의식된 족보의 사실일 수가 없으며 (중략) 그 이외의 어떠한 논리도 가식이다"
라고 말했다.
한편 요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역사학자 한홍구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사>에서 이 문제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두한이 정말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중략) 그러나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확증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러면서 그는 김좌진 장군의 부인 등 유족들이 그를 아들로 인정했고, 안동 김씨 가문에서도 그를 일가로 받아들여준 사실을 지적해 두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한홍구 역시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라는 확증을 제시하지는 못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은 몇 다리 걸치면서 '사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뒤에서 쓸 터이지만, 결론적으로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이 맞다. 그럼에도 의혹이 끊이지 않는 데는 그 누구보다도 김두한 자신의 책임이 크다. 그는 1963년에 출간한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라는 회고록에서, 그리고 1969년의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에서 자신의 출생과 어린 시절과 이후 활동에 관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일관했던 것이다.
ⓒ 김두한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김두한 어릴 적 사진
그 중에서도 우리를 실소케 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김옥균이 자신의 할아버지, 즉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김옥균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뒤 '3일 천하'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을 가 계속 일본에서 머물다 1894년, 상해에서 조선 황실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김좌진은 김옥균과 같은 안동 김씨이기는 하나 1889년에 태어났고 당시 김옥균은 조선 제1의 역적으로 일본에 있었으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또 김좌진이 서울에 머물던 1910년대에 백정들의 결사체인 형평사 초대회장을 지냈다고 하는데(나중에 그를 길러준 설렁탕집 '인사옥'의 주인인 원 노인이 백정 출신으로 이때 김좌진과 인연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김좌진의 활동기록 어디에도 형평사 운동을 했다는 흔적은 없으며, 형평사는 1923년 백정 출신 자산가 이학찬이 진주에서 처음으로 결성했다.
이때는 이미 김좌진이 만주에서 청산리 전투(1920년)를 치르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시기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해방 뒤 북의 김일성이 "8·15 후 50일 만에 나에게 북 노동당원증과 함께 순금 단추가 번쩍이며 금 모리스가 눈부신 육군 소장 제복을 보내왔다"며 당시 거리에 "김두한이 남반부 인민군 사령관에 취임하게 되었다"는 벽보가 나붙었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넘어 폭소가 터진다.
생모는 박계숙 아닌 김계월이란 기생
그의 회고록과 육성증언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가득 찬 지경이니 그의 출생배경에 대해 의문이 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먼저 김두한 자신이 말하는 출생배경을 들어보자.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청년이 되면서 서울로 올라와 안창호 등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다 1916년 즈음에는 노백린 등과 광복단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김두한의 얘기는 그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30대 초반의 김두환. 어릴 적 사진과 비교하면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김좌진이 서울 근교 야산(사직공원 뒤)에서 동지들과 회합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일경들이 이를 알고 들이닥쳐 포위망을 좁혀왔다. 김좌진은 동지들을 대피시킨 뒤 홀로 일제 순경들을 상대해 때려눕히고 자신도 도피했다. 쫓아오는 일경들을 피하기 위해 사직동의 어느 양반집의 담을 넘어 방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 집은 궁녀 박 상궁의 집이었고 그 방은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의 방이었다. 박계숙은 그를 책장 안에 감추어 주었고 김좌진은 위기의 순간을 넘겼다. 책장 안에 있던 그는 간이 크게도 잠이 들었고 그 사이 박 상궁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날로 하인들을 고향으로 보내버리고 이후 모녀가 손수 김좌진의 시중을 들었다. 이때 태어난 혁명아가 바로 김두한이었다.
통속무협소설에나 나올 법한 드라마틱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얼마간의 과장은 섞였을지라도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조사해 본 바로는 여기엔 단 하나의 사실도 없는, 완벽한 거짓말이다.
김두한의 생모는 박계숙이라는 양반집 딸이 아니라 김계월이라는 기생이었다. 1930년 1월,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이 암살당하자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국내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고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했다. 그 가운데 김두한과 관련된 최초의 보도는 다음과 같았다.
"그의 가족은 지금 전부 그의 근거지이든 길림성 모처에 잇다는데 그의 칠십 로모와 그의 안해며 그의 아우되는 김동진씨를 합하야 세 식구가 잇다 하며 시외 모처에 씨의 서자 한 사람이 잇슬이라는데"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여기서 그의 아내는 그가 만주에서 결혼한 나혜국이고 칠십 노모는 장모였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 시외 모처에 있다는 김좌진의 서자가 바로 김두한이지만 <동아일보>는 그 이름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가 바로 이 김두한의 거처가 시외 모처가 아니라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내 취재를 해서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그의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사진까지 실려 있어 신빙성에서 나무랄 것이 없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김좌진) 가장 사랑하던 애첩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이 현재 홍성에 잇느니 혹은 경성 시외에 잇느니 하야 그 확실한 소재처를 아지 못할 안이라 애첩 김계월이가 원산 방면에서 료리업을 한다고 보도되엇거니와 그는 모다 오보이엇스며 허설이엇고 정작 김좌진의 아들 두한이 잇는 곳은 아버지가 잇는 바 바람 거친 그곳과는 정반대로 고요한 조선의 도읍 개성에 잇다. 그는 목하 개성 서본뎡(西本町) 이백 오십 사 번지에서 자긔의 조모와 가치 쓸슬한 그날그날을 소일하고 잇다." (<조선일보> 1930년 3월 17일자)
그가 3월 12일 김두한의 집을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아직 도라오지 안코 어둠컴컴한 방에 두한의 외조모만 병으로 누어 잇섯슬"이었다고 한다. 그가 취재한 바에 따라 김두한의 출생과정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 1930년 조선일보에 실린 김두환의 생모 김계월.
김계월의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상회라는 사람으로 명문 집안이었으나 구한말 격변하는 시대에 몰락한 양반이었다. 집안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결국 김계월은 15세 때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되었다. 연도를 계산해보면 1916년 즈음이다. 바로 김좌진이 서울에서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때 기생집에서 김좌진과 김계월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 홀연 만주로 떠나버리고 김계월은 서울에 홀로 남게 되었다.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떠나는 아버지를 붙들고 어머니께서 태아가 있음을 고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두옥이라 부르라 하시면서 홀연히 집을 떠나셨다고 후일 어머니가 말해주셨다"고 하는데 이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김두한의 영웅심리
그러면 김두한은 왜 이런 자신의 출생과정을 숨기고 무협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꾸며댔던 것일까.
그는 먼저 펴낸 회고록에서는 이후의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자신이 일곱 살 때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말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육성증언에서는 "여덟 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최문우 기자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열두 살로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그는 왜 이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여기에는 김두한이 감추고 싶은 가족의 내력이 있었을 것이다.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김두한이 자신이 여섯 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그래서 사실이다. 다만 어슴푸레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었고 그래서 그가 말하는 연도가 죄다 실제와 틀리게 된 것일 터이다.
ⓒ 맨 오른쪽이 생모인 김계월. 현재까지는 김두한의 주장에 따라 박계숙이 생모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노모의 건강이 악화돼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대략 1926년 즈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고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했다.
그러나 이도 오래 버틸 일은 아니었고 결국 친지들이 없는 개성으로 가서 기생을 하기로 작정하고 개성으로 온 것이다. 아마도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김계월은 다른 기생 두 명을 데리고 요리업을 하기 위해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김계월은 함흥에 있다가 다시 더 북쪽의 흥원으로 갔고 아마도 이후 소식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은 서울에 살 때 잠시 교동보통학교를 다닌 적이 있을 뿐 개성으로 옮긴 이후엔 학교를 가지 못했고 그나마 어머니와의 연락이 끊긴 뒤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집을 나와 서울로 와서 청계천 장차구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두한이 개성 출신의 천애고아라는 얘기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김두한은 이런 자신의 불우한 가족사를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항일투사였듯이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항일투사의 대열에 올리기 위해 일제의 탄압을 받은 것처럼 말을 지어냈다. 이렇게 김두한의 거짓말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어두운 부분은 삭제하고 자신을 영웅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회고록과 육성증언은 바로 그런 거짓말들로 가득 차 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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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월간 말> 2003년 5월호 기사에서 보듯이,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조선일보> 1930년 3월 17일자 취재기사에 의해 명백히 확인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앞서 그의 존재가 기록된 흔적이 다른 곳에 남아 있었다. <매일신보> 1925년 9월 15일자에 수록된 보도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김좌진과 김계월, 8년만에 이역에 해후"라는 제목의 기사가 다음과 같이 들어있다.
"영고탑(寧古塔)에 근거를 두고 노령방면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과격파의 수령 김좌진(金佐鎭)은 자의 정부(情婦) 김계월(金桂月)(27)과 및 그 사이에 낳은 김두한(金斗漢)(8)을 데려가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국경의 경계가 엄중하여 오늘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바 이번 김계월도 정랑 김좌진을 생각하고 항상 매을히 지내던 중 지난 9일에 자기모 박씨(朴氏)와 자식을 데리고 가산도구를 방매하여 여비를 만들어가지고 경성역을 출발하여 무사히 목적지에 이르러 8년만에 부부와 부자가 반갑게 대면하게 되었다더라."
이 기사는 김두한이라는 존재가 이미 1925년 당시 부터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생모가 '김계월'이라는 점,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대담기록이 남아 있지만 김두한과 아버지 김두한의 상봉이 이때 이뤄진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 등을 확인해준다.
그리고 여기말고도 <매일신보> 1930년 2월 13일자에 수록된 기사 "신민부 김좌진 피살은 적확, 사회단체에 부고도 와, 42세의 장년"에도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위의 <월간 말>에 인용된 <동아일보> 동일자 기사에 "······ 시외 모처에 씨의 서자 한 사람이······ 운운" 한 것과는 달리 이쪽에는 가족사항을 훨씬 더 세밀하게 적고 있다.
"유족은 4명 애아(愛兒)는 실종 금번에 피실된 김좌진의 유족으로는 ▲모이씨(母李氏)(68) ▲처오씨(妻吳氏)(45) ▲제동진(弟東鎭)(?) ▲자두한(子斗漢)(11)의 네사람이 있는데 어머니와 아내와 동생은 그가 피살된 산시(山市)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다 하며 그의 아들 두한은 생모인 전조선권번기생(前朝鮮券番妓生) 김계월(金桂月)과 함께 어디 가 있는지 이삼년째 행위불명이 되어 있다 한다."
그러니까 이것만 본다면 항간에 나돈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풍설은 전혀 사실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다. 그가 '장군의 아들'은 맞다는 사실이외에는 그가 남긴 숱한 대담기록과 회고록 등이 엉터리 투성이인 것은 분명하다.
가령 1963년에 나온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라는 회고록이 그러하고, <주간 희망> 1957년 5월 24일자에 나온 '조경희, 희망방담'의 내용에도 그러한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말하자면 그에 관한 많은 기록은 본인이 의도했건 아니었건 간에 이미 약간의 사실이라는 뼈대 위에 허상과 영웅담이라는 비계덩어리를 잔뜩 올려놓은 몰골로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생각건대 김두한에 관한 얘기는 그저 반에반에반쯤만 사실이 그렇겠거니 하고 믿을 일이고, 나머지는 그저 다 재미로 흘려듣는 편이 속이 편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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