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旌 善 全 氏 ★★

주요 인물

별고을 동재 2009. 3. 27. 14:15

주요 인물

 

01.전 섭

  시조  全聶은  백제 개국공신이시다.

  公은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전섭(全聶),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조성(趙成), 해루(解婁), 흘우(屹于), 곽충(郭忠), 한세기(漢世奇) 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명의 공신중의 한사람으로 후에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습니다. [遂與烏干馬黎等 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수여오간마려등 십신남행 백성종지자다)]

이중 왕족인 비류, 온조는 부여씨(扶餘氏)로 오늘날의 서씨(徐氏)의 시조가 되었고 나머지 아홉분의 성씨 중에 다섯분의 성씨는 현재에 전해지고 나머지 네분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도에 변성이 된 것으로 봅니다.

정선 전씨(全氏)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전섭(全聶)은 관계에서 물러나 지금의 천안군 풍세면에 우거하며 살았다고 하며 그의 후손들이 지방에 군거하고 있으며 세계(世系)를 62세(世)로 백제건국과 연대를 거의 같이 하면서 시조의 신도비를 이곳에 세워 그의 온조왕 보필의 공적과 백제건국의 공훈을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08. 전 선

  중시조입니다.  신라 성덕왕때 추부시랑(고려 공민왕때 관제로 환산하면 전법판서)역임하셨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성덕왕(聖德王, 702~737)대는 통일신라의 전성기로서 당나라 문화수입에 힘써 사신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성덕왕 16년(717)에는

수충이 당나라에서 가져  온 문선왕(文宣王, 孔子)과 십철(十哲, 공자의 제자 10인), 72현(賢, 공자의 제자 중 6藝에 능통한 자)의 도상을 바치므로 대학에 모셨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을 만들었으며, 723년에는 혜초가 서역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했다.

  성덕왕 22年(西紀 723年) 봄 3월 왕이 全公을 당에 사신으로 보낼 때 포정( 나마천승의 女)과  정완(대사충훈의 女) 두 명의 미녀와 함께  의복, 그릇, 노비, 수레와 말을 주어 예를 갖추어 보냈더니,  당 현종(685~762)이 이에 대해 말하기를

"여자들은 다 왕의 고자매(姑姉妹, 고종자매)로서 친척을 떠나고 고국을 이별하여 왔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 못하겠다. "하며 후한 선물과 함께 공주(公主)로 봉(封)하여 돌려 보냈다.

  公이 공주와 함께 신라에 돌아오니 성덕왕은 국위를 선양한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신라 때 벼슬이 추부시랑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으로 봉(封)하고 정선에 채녹지(采祿地, 농사를 짓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땅)를 하사하여 정선에 살게하니  후손들이 정선으로 위관(爲貫, 본관을 삼음)하였다.


16. 전이갑

  고려시대에 통합삼한개국공신(統合三韓開國功臣) 입니다.

 고려개국 삼충공(三忠公)인 전이갑(全以甲), 전락(全樂)등 3형 제를 빼놓을수 없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건이 팔공산 오동숲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를 당하자  전이갑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왕건을 탈출시키고 3형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 한다.

그후 태조(太祖)가 크게 슬퍼하시며, 公에게 정선군(旌善君)  봉호(封號)와  시호(諡號)를 충렬(忠烈)이라 내리시고, 公의 동생 의갑(義甲)에게는  죽산군(竹山君)  봉호(封號)와   시호(諡號)  충강(忠康)을 사촌동생 락(樂)에게는 천안군(天安君)  봉호(封號)와   시호(諡號)  충달(忠達)을 내리시고 후손(後孫)에게는 조세와 각종 국가의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전공(全公)은 휘(諱)는 이갑(以甲)이요. 자는 자경(子經),  장호(腸號)는 도원(挑源)으로 정선사람이다.  정선전씨 중시조 정선군(中始祖 旌善郡)  선(宣)의 7세손  우상(禹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公이 태어날 때 그 어머니 꿈에 푸른 옷을 입은 세 노인이 한 아이를 안 고와 주면서 『"이 아이는 장차 명예와 공(功)이 한나라에 충만하리니 잘 보호하여 키우라."』는 이야기를 하고 사라졌다.  그 후 태기가 있어 公이 출생하였는데 태어날 때 온 집안에서 서기(瑞氣)가 충만하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으며,   公이 자라면서 부터는  골상이  자못 보통 사람과 달라서 燕頷鳳眼(연함봉안: 제비턱에  봉황눈)에  거북등(龜背)을 하고 신장이 8척이며, 힘은  강궁(强弓)을  당기고 고 지용(智勇)이  절윤(絶倫)하여  문사(文詞)에도 통달(通達)하시었다. 公의 동생 의갑(義甲) 또한 그 어머니가 기이한 꿈을 꾸고 낳았으며 훌륭히 자라니 그때의 사람들이 두 영웅(英雄)이라고 칭찬하였다.

  태조(太祖)3년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므로 신라의 사신(使臣)  김율(金律)이 와서 도와줄 것을 간청하여  태조(太祖)가  公  신숭겸(申崇謙)에  명(命)하여  정기장군(精騎將軍)을 삼아 가서  구원(救媛)케하니 견훤이 그 소문을 듣고 싸우지도 않고  퇴각(退却)하였다.

  이때 公이 신숭겸(申崇謙)에게 이르기를 견훤이  강폭(强暴)해서 항상 변방의 우환꺼리가 되니 이 기회에 그를 전멸시킴이 좋겠다 하고 그를 끝까지 쫓아 추격하니 그의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견훤만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17. 전보인(輔仁)

 ?∼1019(현종 10). 고려의 문신이시다.  전이갑(全以甲)의 아들이다.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시다.

989년(성종 8)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경학박사(經學博士) 남해도(南海道) 지방에서 학생들을 잘 지도해 지위가 높아지고 상을 받았습니다.

1013년(현종 4) 우상시(右常侍)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018년  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고, 이듬해 우복야(右僕射)로 돌아가셨다.

명경과(明經科)출신으로 여러 번 학관(學官)에 임명되어 당시 사람들이 숙유(宿儒)라고 칭하였습니다..

♤숙유 [ 宿儒 ] 

  학문과 명망이 높은 선비. 


18. 전 언(彦)

   고려 현종때 밀직부사를 역임하셨다.

이부(吏部)에서 효행을  실천하여 모범이 되므로 직첩을 특진시켜  사회에 선행을  권장이 가함을  아뢰어 현종이 밀직부사로 임명하셨다.


19. 전함정(咸正)

 삼중대광판도판서(三重大匡判圖判書)를  역임하셨다.

문종때 전중내급사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곤영절(坤寧節)을  축하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 있습니다.


20. 전총(寵)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셨다.

공이 주부(主簿)로 재직할 때 원지에 유배되었다가 숙종때 몽사(蒙赦)되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전양(諒)

  병부낭중(兵部郎中)을  역임하셨다.

의종때 병부낭중 전양을 요나라에 보내 하정(賀正)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 있습니다.


24. 존걸(存傑)

     ?∼1193(명종 23). 고려의 무신이시다. 정란공신(定亂功臣)으로  책정되시다.후에

금자광록대부상주국(金紫光祿大夫上柱國)을 증하였습니다. 1193년에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 초전 (草田)의 효심(孝心) 등이 난을 일으키자   봉기한 남적 가운데 세력이 가장 큰자는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이었다.

  그들이 망명한 사람들을 규합해서 주, 현을 습격 약탈하였으며 왕은 그것을 걱정하여

  대장군 전존걸을 파견하면서  장군 이지순, 이공정,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을 통솔하고 토벌케 하였다. 그 중 장군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었다.

  이의민은 일찍이 자기 꿈에 무지개가 양편 겨드랑이에서 일어 났으므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옛 도참(圖讒)에 “용손은 12에 다 된다 (龍孫十二盡)란 말이 있고 또 십팔자자란 말을 들었다.

  십팔자(十八子)란  이자(李字)이므로 왕위를 바라보게 되어 약간의 탐욕을 참고 명사 등을 등용해서 헛된 명망을 낚았으며 또 자기 출신이 경주라 내심으로 신라를 다시 일으킬 꿈을 가지고 김사미, 효심 등과 내통하였다.

   그리고 적도들도 많은 재물을 이의민에게 주었다. 이지순도 만족을 모르는 욕심쟁이여서 적에게 재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낚을려고 적과 내통하여 적에게 식량,의복, 신, 버선을 보내고 적은 금은 보화를 보내왔다.  이러하여  군중(軍中)의 정보가 누설되어 여러 번 패전을 초래하였다.

  전존걸은 본래 지략과 용맹이 이름난 장수였으니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분해해서 고하길 만일 법으로 이지순을 처단하면 그의 부친(이의민)이 나를 죽일 것이다.

  또 그렇치 않으면 적세가 더욱 강해 질텐데 장차 그 죄를 누가 질것인가 하며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러나 이 난은 7개월 만에 평정된다.


25.전수룡(守龍)

   고려시대 진주민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사록을  지낸 후  경상도순사(慶尙都巡使)을 역임하셨다.

1200년(신종 3) 진주에서 공사노비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과 이 반란을 진압하던 주리(州吏 : 鄕吏)가 일으킨 반란이 진주민란입니다.

1186년(명종 16) 진주의 수령 김광윤(金光允)이 백성들을 수탈하여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자, 조정에서는 김광윤을 뇌물받은 죄로 귀양을 보내 민란을 사전에 막았다.

  그러나 1200년 진주의 공사노비가 주리들의 탐학에 항거하여 무리를 모아 주리의 집 50여 호를 불태웠다. 이 소요는 주리들에 의하여 진압이 되었으나, 주리의 한 사람인 정방의가 공사노비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궁시(弓矢)를 가지고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을 찾아본 것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목사 이순중이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정방의의 아우 창대(昌大)가 폭력으로 형을 구해내고 불량배를 불러모아 주리(州里)로 돌아다니면서 평소에 원한을 가진 사람 6,400여 명을 죽였다. 조정에서는 소부감 조통(趙通), 중랑장  이당적을 보내어 안무(安撫)하게 하였으나, 정방의 일당의 세력이 커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때 평소에 정방의와 원한이 있던 진주사람 20여 명이 합주(陜州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의 반란세력인 광명(光明)·계발(計勃)을 끌어들여 정방의를 치려 하였으나 도리어 패배하여 합주 노올부곡(奴兀部曲)까지 쫓겨갔다.

  이렇게 기세를 떨치던 정방의 무리의 반란은 그 이듬해 진주 사람들의 봉기로 정방의는 죽고 그 아우 창대는 도망하여 무리들이 흩어지고 난도 평정되었다.


27. 전공열(公烈)

    고려시대 삼별초의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습니다.  후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전라도도병마사(全羅道都兵馬使)를  역임하였습니다.

  제3차 침입때 몽고병이 남하하여 전주와 고부지경까지 범한 일이 있었으며, 부령별초 의병장인 전공열이 거느린 지방 의용군이 부여 고란사 근처에 잠복했다가 몽고 기병 20인을 추격하여, 그 중 2명을 사살하고 병기와 군마 20여필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고려사 고종 편에 기록된 자료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28. 전숙방(淑方)

  우헌납(右獻納)을  역임하셨다.

충열왕때 원통함을  당했다가 충선왕때 복작(復爵)되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었습니다.


29. 전영보

  ?∼1348(충목왕 4)   공은 고려의 문신이시다. 충렬왕 때 낭장에 제수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복위 2)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1320년(충숙왕 7) 밀직부사에 임명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이 되었다.

1324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제수되고

1326년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省)으로 하려는 책동에 적극 반대하여 1등공신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또 원나라에서 충숙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승진한 뒤 삼사사(三司使)에 이르렀다.


30. 전윤장

고려의 문신이시다.

  공은 천안군 삼태리에서  태어났으며 고려시대에 3명의 정승 전성안(全成安), 이승인(李崇仁), 전윤장(全允臧) 이 태어났다고 하여  지금도 삼태리로 불리고 있다.

   고려시대  충숙왕(1332-1339)때 출사하여   충혜왕(1339-1344),   충목왕(1344-1348), 충정왕(1348-1351),   공민왕까지 5대에 걸쳐  역사의 격변기 동안 국가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여 왔으며, 특히 원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교묘하게 대처하여 후환이 없도록 노력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頔)이 반역을 꾀하였을 때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1343년에 우상시(右常侍)에서 서해평양도순위사(西海平壤道巡尉使) 가 되었다가

  1347년(충목왕 3)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교주도도순문사(交州道都巡問使)가 되어 쌍성(雙城)의 인구를 조사하였다.

  1348년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 가는 강릉대군(江陵大君: 뒤의 공민왕)을 호종한 공으로

  1351년(공민왕 즉위년)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다.

이 후 재상(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다음은  고려사에  나오는 기록을 정리하였다.

---충혜왕 4년 9월 정묘일에 첨의평리 강윤충을 양광•전라•경상도 문민질고사로,   찬성사 윤환을 강릉•교주도 도순문사로,   우상시 전윤장을 서해•평양도 순위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문)丁卯 以僉議評理康允忠爲楊廣全羅慶尙道問民疾苦使 贊成事尹桓爲江陵交州道都巡問使 右常侍全允臧爲西海 平壤道巡慰使 [고려사 권제36, 28장 뒤쪽~29장 앞쪽, 세가 36 충혜왕 4.9]  고려 시대 군사도(軍事道)의 하나인 평양도(平壤道)의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파견된 3품의 임시 벼슬. 순위사(巡慰使)는 고려 후기 지방을 순행하면서 군사들을 위무(慰撫)하기 위하여 파견되던 벼슬로, 품계가 2품 이상인 경우는 도순문사(都巡問使)라 하였음. 순위사의 파견은 고려 후기, 당시 심하게 전개되던 지방사회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음

---임신에 동지밀직사사 전윤장을 교주도 도순문사로 삼아 쌍성의 인구를 검괄하게 하였다. 壬申 以同知密直司事全允臧 爲交州道都巡問使 令檢括雙城人口 [고려사 권제37, 10장 앞쪽, 세가 37 충목왕 3.1]

---병자일에 임금이 대호군 손수경과 전윤장을 보내어 금・은과 대정아를 가지고 원에 가서 집사자에게 뇌물로 주고 복위를 구하였다.

(원문)丙子 王 遣大護軍孫守卿 全允臧 賚金銀 及大頂兒 如元 賂執事者 求復位 [고려사 권제36, 12장 앞쪽, 세가 36 충혜왕 2 충숙왕 복위년.5]

---전윤장   전 판서운관사   손원  대호군 이광원  김장  호군 진교화  승신 이헌 손습중랑장 왕석  이충 이원용  이광계   낭장 전경 홍매노 등은 2등공신을 삼아 부모 처에게는 3등을 뛰어 봉작하고 1자에게는 8품을 주고 아들이 없으면 사위를 대로 하여 9품을 제수하고 전 70결 노비 5구를 주라」고 하였다. 


41.전응조

임하군파 파조입니다.


42.전용 

  자는  여견(汝見)이시고  호는   석천(石泉)이시다.

  안동 하회마을 유성룡 댁에 들리면 공신록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선조때 3등 호성공신입니다.   호성공신(扈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님을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데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훈호이며, 1604년(선조 37)에 86명을  3등으로 나누어 녹훈(錄勳)하였다.        1등에는 이항복·  정곤수의 2명,     2등에 신성군(信誠君)·  이원익·  윤두수·  심우승·  이호민·  윤근수 · 유성룡· 김응남 등 31명,

  3등에 전룡(全龍), 허준(許浚)  정탁·  이헌국·  유희림·  이유중·  임발영·  기효복  등 53명이시다.

  공은  선조 임금님의  신하로서 의주까지 피난하는데 가까이서 모시고, 종묘의 사주(위패)를 모시고 오는 과정에서 왜군들에게 왼쪽뺨과  왼쪽귀가 떨어져 이빨이 드러나는  중상을 입고 임무를 완수 하는 등 큰 공을 세워   호성공신으로 되었으며,  벼슬이 2계급 특진하였으며, 상으로 노비7명, 토지60결,  말1필, 은자 등을 하사 받으셨다.

子 대익은 음서로 경상북도 청송부사, 평안북도 벽동부사를 역임하셨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에  있다. 


45. 전계선

  자는 낙이(樂而) 호는   정시(庭試)이시다.

충주에  태어나서  사시다가  강릉으로 내려오셨다.

강릉 입향 시조입니다. 증 한성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이시다.


49.전필구 

  자는  세헌(世憲)이시다.

이 분을 정점으로 소문중을 형성하였으며, 슬하에 자녀는 3남이 있었으며,

  맏이는 석모( 원큰댁 으로 칭하며 후손으로는 형표, 완표.......)

  둘째는 익모( 유덕댁 이라 칭함, 우리가 소속된 소문중임, 후손으로는 윤재 , 과웅, 호웅, 기웅, 찬국, 찬진, 찬득, 원복, 원익, 원선, 독고성, 독고영재...)

  셋째는 학모( 초시댁  또는 맹월네댁이라 칭하며, 철종임금때 초시에 합격하여 전초시댁이라고 강릉지방에 널리 알려짐) 세집 자손들을  3대소가 (三大小家)라고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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