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旌 善 全 氏 ★★

정선 전씨

별고을 동재 2009. 7. 26. 18:25

  정선전씨는 백제 개국에 참여한 ‘전섭’을  시조로 하여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가문입니다.

 조선 초 개성왕씨들이 전씨로 바꾸었다는 구전설화가 있지만, 백제 멸망 10년 후인  서기 673년에 건립된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의 기록에 의하면 전씨가 백제 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이 고증됩니다.

 우리 기록에 중국식 이름이 보편화 된 것은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신라를 거치면서이고, 이때조차도 지배층의 이름이 그럴 뿐, 가끔 등장하는 보통사람들의 이름은 매우 이상한 이름들입니다.

  성씨가 일반화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이다. 조선 전기(15, 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無姓層)이 그만큼 많았다.

  이와같은 사실을 감안하면 전씨가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후기에 지금의 편제로 환산하면 부총리, 장관 등 고급공무원을 많이 배출하여 국가에 헌신하였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조선건국을 즈음하여 불사이군의 충절로 개성 두문동에 은신하였으며, 지금 편제로 환산하여 법무부장관을 지닌 채미헌 전오륜을 시작으로 침체기를 거쳤으며,

  다시 재도약기를  맞이하여  조선후기에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전봉준 장군이 있었으며, 최근에는  전두환  대한민국 12대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정선전씨를  대종으로 하여  18본으로 분적하였다. 즉  천안(天安)·  용궁(龍宮)·  경주(慶州)·  기장(機張)·  전주(全州)·  나주(羅州)·  죽산(竹山)·  성주(星州)·  황간(黃澗)·  안동(安東)·  옥천(沃川)·  경산(慶山)·  함창(咸昌)·  성산(星山)·  평강(平康)·  팔거(八莒)·부  여(扶餘) 등 17본이 있으나 모두 동원분파(同源分派)이고 전씨대동보(全氏大同譜)에서는 정선파· 천안파(天安派)· 용궁파(龍宮派)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중에서  정선전씨는  다시 6개파로 나누어졌습니다.

분적도와  6파계도를  다음 순서로 소개하겠습니다.


1. 정선전씨 종장

2. 분적도

3. 6파계도

4. 항렬도


1. 정선전씨 종장

           (종 장)

 

 중앙의 원은 종인사이의 융화단합을 뜻하고, 원 안의 사선은 사람 인자형으로서 국민 상호간 서로 협조함을 의미하고, 국민 상호간 단결된 힘으로  인류 번영에 헌신함을 의미합니다.

         

2. 분적도




☺정선전씨(旌善全氏)

  시조 전섭은 백제 개국공신이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이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典法)판서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섭을 시조로 하고 전선을 득관중 시조로하고 있다.

전씨문중은 정선,천안,성산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정선을 대종으로 한다.

[ 대표적 인물 ]

  전씨는 역사 깊은 명문벌족으로 신라, 고려시대를 통틀어 군(君)에 봉해진 사람이 35명, 정승 12명, 판서 43명을 배출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만 57명을 배출했다.

  안창호선생과 신민회를 조직,적극적으로 배일(排日)운동을 벌였던 전덕기와 의병장 전덕원 등이 그들이다.


♡ 전덕기 (全德基)

[1875.12.8~1914.3.23]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경기 이천 출생이다. 서울 상동교회 목사로 상동청년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지도하고, 1906년 이준·박정동과 함께 국민교육회를 창설,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듬해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양기탁·이갑·윤치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그 중앙위원이 되어 배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석방된 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서울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전덕원 (全德元) [1870~?]

 호 호은(湖隱) 또는 정송(挺松).

평북 용천출생으로 유인석의 문하생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 각국 공사(公使)에게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보내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잡혀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1912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으로 망명, 1919년 류허현[柳河縣]에서 동지들과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재무부장이 되었다.

 그 해 부하를 이끌고 국내에 잠입, 5,700여 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1920년 다시 국내에 들어와 30여만 원의 거액을 모금하였다.

 1922년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체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자 다시 재무부장에 취임하였으며,

 1921년 환런현[桓仁縣]으로 이주하여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고 군무부장이 되었다.

 그 후 8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입국, 신의주 ·성진 ·청진 등의 주재소 ·세관 ·기타 관공서를 파괴하다 린자거우[林家溝]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평양에서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는 이병기 ·홍주 ·박승연 등과 독립운동사를 편찬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박상문의 밀고로 다시 붙잡혀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인구] 124,993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형(鎣) 우(雨) 인(寅) 병(炳)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박(薄) 모(模)  경(炅) 준(埈) 주(鑄) 환(渙) 병(柄) 걸(杰) 찬(瓚) 수(銖) 형(泂)  황(煌) 은(垠) 강(鋼)  철(澈) 종(棕) 욱(煜)


☺완산전씨(完山全氏)

  시조 전집(全潗, 시호는 충정)은 도시조 전섭의 30세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때 중랑장으로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추충정난공신(推忠靖扈亂聖功臣)이 되어

완산백에 봉해지고 그후 삼중대광첨의 문하시중 평장사(三重大匡僉議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하여 완산을 본관으로 해서 대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완산 전씨는 조선시대에 여러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명종 때의 전치원(全致遠)은 1606년 사헌부감찰, 충무위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거쳐 춘추관기사관으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서예와 성리학에 능통했고 저서로는 "임진난이록(壬癸亂離錄)"이 전한다. 그리고 전우(全雨)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우고 중임도찰방(重林道察訪)에 발탁되었으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또 전형은 서예로 일가를 이루었고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 통신사 임광을 수행, 일본에 건너가서 글씨로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는 "해사일기"가 전한다.

  전준은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각처에서 많은 적을 죽이고 삼학진(三鶴陣)에서 왜병의 기습을 받아 역전하다가 순절하였다. 1638년 8읍 사림이 장문(狀文)을 연정하여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또한 전문도 난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각처에서 공을 세우다 순절하였다.

  그리고 전홍칠(全弘七)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공양에 극진하였는데 15세 때 부친의 상을 당하여 아우 전홍팔(全弘八)과 함께 여막에서 거상(居喪)하니 범이 와서 호위해 주었고, 용천(涌泉)이 출중하였다.


♤전치원(全致遠)

  전치원(1527∼1596)의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으로 초계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7년(중종 22년)에 초계군 도방리(지금의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에서 아버지 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탁계집(濯溪集)』 5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전치원은 15세(1541년)에 당시 재령(載寧)군수로 재임하고 있던 할아버지(永綏)를 따라가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자질이 호방한 것을 알고 무예를 가르치고자 했다.  16세(1542년)에는 재령에 머물면서 여름에 『소학』을 가지고 황강(黃江, 李希顔)선생을 찾았는데, 황강선생은 그에게 ‘『소학』 배울 나이가 이미 넘었으므로 제자로 받아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전치원은 5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가르침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의 자질을 시험해 본 황강선생은 ‘장차 대성할 인재’라 생각하고 비로소 제자로 삼았다.

 33세(1559년) 5월에는 스승인 황강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키워준 은혜와 가르쳐 준 은혜가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제삿날이면 반드시 참례하면서 마음으로 3년복을 입었다.

 급문 : 전치원은 29세(1555년)에 삼가 토동정사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30세(1556년)에는 퇴촌동(退村洞)에서 남명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37세(1563년)에는 남명선생을 찾아 덕산의 산천재(山天齋)로 가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벼슬 : 전치원은 67세(1593년)에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강학 및 교유 : 전치원은 35세(1561년)에 황강(黃江)선생의 「묘갈명」을 남명선생이 찬하고 그가 글씨를 썼다.

그는 정자를 짓고 호를 탁계(濯溪)라고 하였는데 이 호는 굴원이 지은 어부사의 구절 중에서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어야 한다’는 구절에서 ‘씻을 탁()자’를 따온 것이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가을 8월에 월와 진극원(陳克元)이 찾아 왔다.

이 때 진극경이 따라와 전치원과 함께 하였으며, 공경하고 중히 여기면서 이르기를 ‘진씨(陳氏)의 가문에 장차 점점 나아감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月窩逸稿』).

37세(1563년)에는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김면, 배신, 이기춘(李起春) 등의 제현들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40세(1566년) 봄에는 김유(金紐)가 찾아왔고,

 43세(1569년)에는 김유가 찾아와서 시를 주었다.

 44세(1570년) 3월에는 이효원이 구정(鷗亭)으로 찾아왔고, 정와 조수천이 와서 공부하였으며,

 47세(1573년)에는 안극가(安克家)가 찾아와서 경의를 공부하였다.

 48세(1574년)에는 이대기가 찾아와서 『중용』을 읽자, 전치원은 성명(誠明)의 이치를 강론하였다(『雪壑先生文集』).

 52세(1578년) 봄에는 강정(江亭)을 완성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벗삼아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이 정자는 후일 손자 전영이 이름을 와유헌(臥遊軒)으로 고쳤으며, 지금의 쌍책면 매호리에 있다.

 55세(1581년)에 추곡 강몽린 상경(祥卿)이 계효당명(繼孝堂銘)을 지었다.

 59세(1585년) 가을에는 하혼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주었다.

 60세(1586년) 봄에는 고양(高陽)의 벽송정(碧松亭)에 있었다.

가을에 노흠 등과 황계폭포를 유람하였는데, 이 때 이흘(李屹)이 따라와 시를 남겼다.

 61세(1587년)에는 진주(晋州) 도동(道洞)으로 최영경을 방문하였고,

 62세(1588년)에는 안극가(安克家)를 방문하였다.

 의병활동 : 전치원은 66세(1592년) 여름 4월에 왜구가 밀어 닥치자 열군(列郡)이 와해되었을 때 이대기와 함께 창의하여 토적(討賊)할 것을 약속하고, 곽재우와 합세하였다(『雪壑先生文集』).

  당시 전치원은 아들 우()와 조카 제()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집안이다.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하니 각자 고을 내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군내에 의병모집 통문을 돌렸으며, 모집된 의병은 외군과 내군으로 편성되어  내군은 이대기가, 외군은 전치원이 통솔하였다.

  이 때 전치원은 진영을 구축하고 몸소 훈련을 시키면서 많은 의병들을 부양할 군량미가 부족하자 사비로 조달하였고, 관곡은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조직된 초계의 의병은 황강 변에서 6월 3일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6월 11일 낙동간 사막진에서 왜선과 왜적을 대피하였고,

 6월 17일에는 낙동강을 도하하는 적을 물리쳤으며, 이 후 수 차례의 소규모 유격전과 대규모 전투에서 모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전으로 말미암아 왜군의 낙동강 도하를 차단하여 초계지방과 우도지역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63세(1589년) 봄에는 금병팔첩(錦屛八疊)써서 장자(長子) 우()에게 주었다.

8월에 주부자(朱夫子)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초서로 쓰고, 집에 보관하였다

  67세 때(1593년) 정월에 아림의 김면의 진지에 가서 모였다.

 가을에는 박진사, 이언영이 찾아왔고, 조정에서 화의(和議)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탄(憤歎)하는 시를 지었다.

 서원창건활동 : 전치원은 38세(1564년)에 황강선생을 위하여 청계서원(淸溪書院: 慶尙南道 地方文化財 136)을 창건하였는데, 이 서원은 지금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있다. 

  69세(1595년)에는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지었다.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전치원은 64세(1590년)에 도내의 제현들과 더불어 최영경의 신원상소를 청하였는데, 이 때 최영경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이로, 박제인, 이정(李瀞), 오장(吳長), 문위(文緯), 하혼 등이 모여 상소추문(上疏推文)하였고, 문경호(文景虎)가 소두(疏首)가 되었다.

 향사 : 전치원은 1596년(선조 29년) 12월13일에 70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후 지역 유림들에 의해 연곡사에 봉안되었고, 1702년(숙종 28년) 청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술 및 작품 : 전치원은 47세(1573년)에 성운(成運)이 지은 「남명선생묘갈명」의 글씨를 썼다.

□ 참고자료

 『慶尙巡營錄』.  『壬辰戰亂史』.  李 魯, 『龍蛇日記』.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草溪邑誌』.  『大東野乘』.  『韓國史大辭典』.  『韓國人名大辭典』.  『大韓國史』 5卷.  『民族文化大百科辭典』 22.  金德珍, 「濯溪 全致遠과 雪壑 李大期의 義兵活動」,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현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전두환 대한민국 12대 대통령이 있다.

[인구] 6,811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형(鎣) 우(雨) 인(寅) 병(炳)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감천전씨(甘川全氏)

시조 전언(全彦)은 도시조 전섭의 30세손이다.

전언은 고려 충숙왕 때 밀직부사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를 역임했으며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감천(안동에 속한 현으로 현재의 예천)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감천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2세손인 전숭간(全宗幹)은 고려시대에 도순문출척사(都巡問黜陟使)를 지냈고,그의 아들인 전사안(全思安)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전온(全穩)은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다.

조선시대의 전처정(全處貞)은 별좌(別坐), 전세적(全世積)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를 지냈으며 전백옥(全伯玉)은 군수, 전련은 현감, 전순필(全舜弼)은 목사를 역임하였다. 전오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전신철(全愼喆)은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지냈으며 전의혁(全義赫)은 부총관 전종우(全鐘佑)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그리고 전대득(全大得)은 병조참판, 전태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인구] 6,399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경산전씨(慶山全氏, 옥산전씨)

시조 전영령(全永齡)은 도시조(都始祖) 전섭의 27세손이다.

그는 고려 신종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 공을 세워

옥산군(玉山君, 지금의 경산)에 봉해졌다.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옥산(경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묘소는 경북 경산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시조 영령의 7세손으로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때 간관(諫官)으로 이인임(李仁任)을 탄핵하다가 유배되었다.

공양왕때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고,

  조선이 개국된후 병조전서를 시작으로 경기도*경상도 관찰사 대사헌으로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하고 , 태종 5년에 예조판서(禮曺判書)에 이르렀다.

문경공(文卿公) 전한(全翰)은 희(禧)의 아들로 중종12년(1517년) 문과에 급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합천군수. 장단부사(長湍府使), 대동찰방. 양주*해주목사(楊*海州牧使)를 지냈다.

  그가 장단부사로 재임시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연성위(延城尉)가 한 왕자(王子)와 전답(田沓)을 다툴 때 관찰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공정한 판결을 하여 김안로 등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마음이 넓고, 송사에 명쾌하였으며 청렴한 관원이었다. 그의 형 전헌(全獻)도 중종17년 문과에 급제 하여 성권(成權)을 지냈다.

  전응창(全應昌)은 순(珣)의 아들로 1572년(선조5년)문과에 급제, 충청도사(忠淸都事)를 지냈으며,

  아우 계동(溪東) 전경창은 1573년(선조6년) 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정언(正言)에 이르렀으며.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가야산에 들어가서 학문에 전념했다.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계된 일을 선조께 상소 전임사신으로 하여금 맡게 하였다.


♡전백영(全伯英

시호는 문평(文平)이며

 생몰년 미상.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공민왕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75년(우왕 1) 간관으로서 우헌납 이첨과 더불어 재상 이인임의 죄를 탄핵, 그의 처형을 요청하였다가 도리어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간의(諫議)를 역임하였고,  1397년(태조 6) 병조전서로서 서북면선위사에 임명되어 축성에 적당한 곳을 찾아 나섰다.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출척사(豊海道都觀察黜陟使), 

  1399년(정종 1) 대사헌, 다음해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거치면서 불교가 인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왕이 이를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401년(태종 1) 노비변정도감제조(奴婢辨正都監提調)·경상도도관찰출척사,     1404년 승녕부윤(承寧府尹)을 지내고, 이해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인구] 14,322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치(致)  선(銑)  홍(洪 ) 식(植)  제(濟)


☺경주전씨(慶州全氏)

  시조 전공식(全公植)은 도시조 전섭의 27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안염사(按廉使)로 있으면서 몽고군이 침입하자 공을 세워 계림(현 경주)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해서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2세손인 전민(全敏)은 고려시대에 중랑장을 지냈고,

그의 아들인 전인적(全仁迪)은 산원랑(散員郞), 전석(全碩)은 전객령(典客令)을 지냈다. 조선시대의 전세(全世)는 공조전서(工部典書), 전인우(全仁祐)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냈고, 전수준(全秀俊)은 판관(判官), 전수만(全壽萬)은 군수를 지냈으며 전흡(全洽)은 검교의 관직을 지냈다.

[인구] 14,884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기장전씨(機張全氏)

  시조 전영(全泳)은 도시조 전섭의 30세손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부전서 판전농사사를 역임하고 공민왕 때 기장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해서 기장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인구] 14,884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형(鎣) 우(雨) 인(寅) 병(炳)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나주전씨(羅州全氏)

  시조 전경(全卿)은 도시조 전섭의 30세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역임하고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조적의 난에 공을 세워 나성(羅城, 나주의 별호)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나주를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나주 전씨 가문은 고려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관직에 오른 전보초(全輔初)를 비롯하여 사간(司諫) 전유(全瑜)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직장(直長)을 지낸 전엄시(全儼始), 부사(府使) 전사맹(全師孟), 별시(別提) 치일(全致逸) 부호군 전천수(全千壽),

  그리고 병조좌랑을 지낸 전성준(全聖準), 부호군을 지낸 전사정(全士亨)과 현감 전성택(全聖澤), 전성신(全聖臣), 오위장(五衛將) 전경회(全慶會)를 비롯, 감찰(監察) 전상원(全尙源), 참봉(參奉) 등의 관직자를 배출 하였다.

[인구] 17,687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흥(興) 광(光) 규(奎) 석(錫) 태(泰) 근(根) 희(熙) 배(培) 진(鎭) 수(洙) 주(柱)


☺성산전씨(星山全氏)

시조 전흥(全興)은 도시조 전섭의 26세손이며 도순사(都巡使) 전수용(全守龍)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1231년 몽고의 철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침입할 때 공을 세워 대광(大匡)에 오르고 성산(성주의 고호)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성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에 있는 원모제에서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 대표적 인물 ]

  고려시대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한 전대평(全大平)을 비롯하여 사평(司評) 전인(全仁), 이부상서 전지(全智)와 조선시대에 판관을 지낸 전진,목사(牧使) 전지덕(全之德), 참의 전복례(全福禮), 직장(直長) 전휴(全休),장령(掌令) 전효명(全孝明), 상호군 전송(全松), 절제사(節制使) 전봉성(全鳳城), 부사 전기선(全起先), 참의 전전(全詮),그리고 공조참의 전흥신(全興信), 현감 전재석(全在奭), 판관 전재봉(全在鳳) 등의 관직자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전신(全信)은 고려말 관직이 병부상서에 올랐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은거하였다. 후에 태종이 즉위하여 徵命하였으나 나가지 않아 곧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조선시대 의사(義士)인 전기업(全起業)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대검과 죽창으로 호군과 싸우다가 전사 한 충의의 인물이다.

[인구] 11,397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효(孝) 창(昌) 수(壽) 몽(夢) 경(敬) 이(以) 광(光) 응(應) 대(大) 시(時) 성(聖) 도(道) 위(胃) 익(益) 겸(謙) 종(宗) 사(思) 언(彦) 명(明) 재(在) 석(錫) 선(善) 순(淳) 동(東) 희(熙) 기(起) 형(鎣) 흠(欽) 장(章) 우(雨) 정(廷 )


☺성주전씨(星州全氏)

  성주 전씨의 시조인 전순(全順)은

도시조 전섭의 28세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

공조판서를 지내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해서 성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조선시대 형조참의를 지낸 전전중(全殿中)을 비롯하여

부사의 관직에 오른 전환(全煥), 현감 전형(全炯), 이조참판 전찬(全燦), 도사(都事) 전영기(全永期), 의관 전형택(全炳宅), 군자감정 전성달(全聲達), 대호군(大護軍) 전황,판사 전문립(全文立), 별제(別提) 전영담 부호군 전도흥(全道興), 좌승지 전진량(全進良), 판관에 이른 전효관(全孝寬)과 의금부사 전충관(全忠寬), 대호군 전윤영(全胤榮), 오위장(五衛將) 전영완(全永完), 사복사정(司僕寺正) 전진수(全進壽) 그리고 동지중추(同知中樞)를 지낸 전영학(全永學), 부호군 전영필(全永弼) 등은 당대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었다.

[인구] 5,469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형(鎣) 우(雨) 인(寅) 병(炳)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옥천전씨(沃川全氏)

  시조 전학준(全學俊)은 도시조 전섭의 23세손으로 영동정(領同正)을 역임했으며, 그의 5세손 전유(全侑)가 고려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 현재의 옥천)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정선에서 분관하여 옥천을 본관으로 해서 대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고려조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전필(全弼)을 비롯하여 판도판서를 지낸 전유(全侑), 이부전서(吏部典書)의 전광운(全光韻), 진의부위(進義副尉)의 전의(全義), 그리고 부제학을 지낸 전지(全智) 등을  배출하였다.

  한편 전명룡(全命龍)은 조선 인조 때의 인물로서 1627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그는 도학과 문장이 뛰어나 후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옥천의 봉양서원, 영주의 방산사(方山祠)에 제향되고 있다.

  또 전익희(全益禧)는 1624년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1641년 지평(持平)을 역임, 선산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전희철(全希哲)은 단종 때 벼슬이 상장군에 올랐으나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 임종 때 아들에게 1 년에 한번씩 영월에 찾아가 단종능에 참배하도록 당부했다.

  선조대의 인물인 전식(全湜)은 1589년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많은 왜적을 죽이고, 강원도 찰방이 되었다.

1603년 문과에 급제, 병조참지를 거쳐 이조참의, 대사간에 올랐으며, 1642년 지중추부사, 동지경연사, 동지춘추관사에 이르렀다.

  전극항(全克恒)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이름을 떨쳤고

1624년 문과에 급제, 운문관 검열(芸文館 檢閱)을 거쳐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


♡ 전명룡(全命龍)

 1606(선조 39)∼1667(현종 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백유(伯兪), 호는 영서(영西).

아버지는 대승(大承)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부호군 운(雲)의 딸이다. 유년시절에 작은아버지인 중승(仲承)으로부터 배웠다. 1623년(인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162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30년 성균관학정 겸 봉상시봉사에 제수되었다.

2년 후 성균관박사 겸 양현고직장 및 성균관전적·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3년 예조좌랑으로 춘추관에 재직하면서 소신 있는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사직을 청원하여 흥덕 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때 청렴결백한 태도와 위민정책(爲民政策)을 실시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선치를 찬양하였다. 어사 심동구(沈東龜)가 그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여 임금으로부터 의복 한벌을 하사받았다.

1640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1643년 경성판관으로 임명되어 낙후된 교육을 일신시켰다.

1647년 평양서윤, 1650년(효종 1) 흥양현감, 1654년 자인현감, 1659년 풍기군수·영암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영암에 재직하면서 흉년이 들자 부족한 진곡(賑穀)을 대동미(大同米)로 변통하여 구제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그뒤 1662년(현종 3) 울산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665년 영해부사로 재임 중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 접수된 부의금을 관비에 충당시키기도 하였다.

만년에 대사헌·대사간 등에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철학을 굳게 지켜, 그가 죽었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살림마저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친우들의 도움으로 치렀다.

 저서로는 《영서집》 4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영西集


♡ 전익희(全益禧)

 1598(선조 31)∼1659(효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자수(子綬), 호는 망일당(望日堂). (磊)의 아들이며,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정언으로 있을 때 권신 김자점(金自點)의 죄를 탄핵하다가 북변의 외직으로 쫓겨났다.

1641년 지평이 되고 뒤에 봉산군수· 선산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서예에도 뛰어났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嶺南人物考


♡ 전 식(全 湜)

  1563(명종 18)∼1642(인조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증이조판서 여림의 아들이다.

유성룡·장현광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익남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이준 등과 산수를 유람하여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제수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하여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하였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님을 들어 이를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에 가계(加階)되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增補文獻備考,   凝續雜錄,   凝川日錄,   默齋日記.


♡ 전극항(全克恒)

 1590(선조 23)∼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덕고(德古)·덕구(德久), 호는 규천(虯川). 대사헌 식(湜)의 아들이다. 정경세(鄭經世)와 이준(李峻)을 사사(師事)하였다.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待敎)를 거쳐 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예조정랑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호종하던 중 인조의 명에 따라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가 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특히, 시에 뛰어났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선진들로부터 경이와 찬탄을 받았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1778년(정조 2) 정려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正祖實錄    愚伏集

[인구] 37,38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우(愚) 구(九) 병(丙) 기(基) 용(鎔) 우(雨) 상(相) 섭(燮) 정(廷) 호(鎬) 영(泳) 주(柱) 환(煥)  채(埰) 진(鎭) 철(澈) 계(桂) 영(榮) 규(圭) 태(兌) 호(浩) 병(秉) 형(炯)


용궁전씨(龍宮全氏)

  시조 전방숙(全邦淑, 시호는 문정)은 도시조 전섭의 28세손으로

전공렬(全公烈)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한림학사,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하고, 용성(현재의 용궁)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용궁을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 묘소는 강원도 평창군 동도산에 있었으나 최근에 용궁으로 옮겨 모셨다.

[ 대표적 인물 ]

  고려시대에 태사(太師)를 지낸 전정민(全正敏)을 비롯하여,

전법총랑을 지낸 전충경(全忠敬),

  조선시대에는 세종 14년에 문과 급제하고 군수(郡守)를 지낸 전중권(全仲權), 현감을 지낸 전순조(全順祖) 등 많은 관 직자를 배출하였다. 정언(正言)을 지낸 전영귀(全永貴), 인의(引儀)를 지낸 전몽정(全 夢井),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전찬(全纘) 등이 발전을 이룩하였다. 전원발(全元發)은 고려 말엽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하고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른후 귀국하여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당시에 글씨가 뛰어나 이름을 떨쳤으며 용궁의 소천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그리고 전명삼(全命三)은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민심을 샀고,

  전삼달(全三達)은 병마절도사를 지내면서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웠다.


♤전원발(全元發)

 ?∼1421(세종 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이다.

전법총랑(典法摠郞) 충경(忠敬)의 증손으로, 판도총랑(判圖摠郞)

대년(大年)의 손자이며,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진(珒)의 아들이다.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영록대부(榮祿大夫)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작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 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가 있다.아들에 사복판사(司僕判事) 한(僩)이 있으며,

손자 강()·근()·경()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으로서 현달(顯達)하였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百氏通譜


♡ 전중권(全仲權) :

   1405(태종 5)-?, 용궁면 가야리 출신, 본관은 용궁, 군사 근(郡事謹)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 생원시 합격, 1432년(세종 14) 식년 문과에 진사과 7위로 급제하여 이조 정랑, 사헌부 감찰과 집의, 군수를 지냈다.  [세종실록] : 1442년(세종 24) 2월 10일에 좌헌납 유지(庾智)가 왕에게 이뢰기를, "전중권은 전(前)의 품계가 6품인데, 판관(判官)으로 올렸으니, 옳지 못합니다. 청하옵건대, 갈으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중권의 일은 고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 군수를 지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효자 전오륜

   전오륜(1631-1720)은 용궁면 읍부리 출신으로, 자는 천서(天敍), 호는 어주(漁洲), 본관은 용궁, 이성(以性)의 손자로, 상구(尙耉)의 아들이다.이현일의 제자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용모가 단정 우아하고 예절이 발랐다. 1660년(헌종 1)에 진사가 되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홀어머니를 모시려고 과거 시험까지 포기하였다.

   나이 70세 때(1702) 도둑들이 칼과 창을 마구 휘두르며 살던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이 때 전오륜은 자신의 안정보다는 어머니의 안전을 위하여 어머니를 업고 황급히 나오자,

  모발이 하얀 늙은이가 100세의 늙은 어머니를 업은 모습을 도둑의 우두머리가 보고 감탄하여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진실한 효자이다. 너희들은 이 집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건드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당시 용궁현감 이지석이 이 일을 듣고 전오륜의 효행을 아름답게 여겨 손수 '내무당(萊舞堂)'이라는 3자의 현판을 써 주었는데,

  이는 옛날 중국의 효자 노래자가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 70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놀이를 하며 춤을 추던 집이라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소문이 나자, 1714년(숙종 14)에 암행어사 이병상이 조정에 보고하기를,

  "전오륜은 나이 70여 세가 되도록,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친히 점검하여 부모님께 올리고,

항상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렸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매일 성묘를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나이 84세에 특별히 임금이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주었다.

뒤에 효행으로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내외교수편(內外交修篇)>, <사무사설(思無邪說)>등이 있고,

남긴 글로는 문집이 있다.

  또 용궁향교의 세심루 기문(洗心樓記文)을 지었고, 사헌부 지평 김세흠의 국방 대책에 대한 상소문을 초안해 주었다

[참고문헌]

嶺南人物考


♡ 전명삼(全命三) :

 1663(현종 4)-1720(숙종 46), 용궁면 가야리 출신, 자는 석이(錫爾), 호는 야은(野隱) 또는 교은(郊隱), 본관은 용궁, 인(仁)의 후손, 유학(幼學) 오교(五敎)의 아들, 석삼(錫三)ㆍ달삼(達三)ㆍ덕삼(德三)의 형,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과 남악(南岳) 김복일(金復一)의 제자이다. 부모 슬하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87년(숙종 13) 식년 생원시에 3등 32위에 합격, 1691년(숙종 17) 증광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였다. 1693년(숙종 19) 12월 13일 참하로서 6품으로 승품(陞品)되었고, 학유, 사과, 예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비인(庇仁), 자인(慈仁) 현감을 역임하여 잘 다스렸고, 예조 좌랑을 거쳐 정랑을 지냈고, 경상도 병마절제사로 취임 전 타계하였다.

 일찌기 문사(文詞)와 명망이 일시에 뛰어났다. 유집이 있다.

 참고문헌 (龍宮縣邑誌 1780 1832, 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司馬榜目, 文科榜目, 備邊司謄錄, 醴泉郡誌 1939)

[인구] 22,375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환(煥) 재(載) 호(鎬) 홍(洪) 식(植)


☺죽산전씨(竹山全氏)

시조 전한은 도시조 전섭의 28세손으로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부사로서 1231년 몽고군이 침입할 때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죽산군에 봉해졌다.

그 후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하여 죽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2세손인 전학기(全學基)는 현감, 그의 아들인 전득문(全得文)은 국자감(國子監)을 지내면서 가문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직장(直長)을 지낸 전팔원(全八元), 부호군을 지낸 전성옥(全性玉), 승지를 지낸 전문적(全門簡)과 전응경(全應慶)은 조선시대에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전의존(全義存)은 사정(寺正)을 지냈으며, 전의화(全義和)는 현감, 전인(全仁)은 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전민태(全敏泰)와 전취대(全就大), 전팔급(全八及), 전팔고(全八顧)는 학자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전수옥(全守玉)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인구] 11,229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형(鎣) 우(雨) 인(寅) 병(炳)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박(薄) 모(模) 경(炅) 준(埈) 주(鑄) 환(渙) 병(柄) 걸(杰) 찬(瓚) 수(銖) 형(泂) ? 황(煌) 은(垠) 강(鋼)

철(澈) 종(棕) 욱(煜)


천안전씨(天安全氏)

  시조 전섭은 온조왕이 백제를 개국할 때 공을 세우고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歡城, 천안의 별호)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천안으로 하고 16세손 전낙을 중시조로 한다.

- 천원군 풍세면 삼대리에 단(壇)을 만들고 음력10월 1일 향사한다.

[ 대표적 인물 ]

  고려 충숙왕때의 전신(全信)은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냈으며 백이정, 이제현(李齊賢) 등 당시의 석학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조선 선조36년 무과에 급제한 전상의(全尙毅)는 여러 벼슬을 거쳐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구성부사로서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다가 순절했다.전동흘(全東屹)은 효종 때 무과에 급제해서

  특히 용병에 능하여 이상진(李尙眞), 소두산(蘇斗山)과 함께 삼걸(三傑)이라 불렀으며 현종때 7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숙종때는 훈련대장(訓鍊大將)등을 지냈는데 통영(統營)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지기까지 했다. 전동흘(全東屹)은 철산부사 시절에 장화와 홍련의 원한을 풀어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조선말기의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트게한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다.

[인구] 114,016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용(用) 원(元) 상(尙) 래(來) 무(茂) 범(範) 상(庠) 재(宰) 정(廷) 옥(沃) 위(胃) 욱(旭) 남(南) 우(雨) 성(晟) 기(起) 강(康) 장(章)


♡ 전상의 (全尙毅)

 1575(선조 8)∼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천안(天安). 용()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고 1627년(인조 5) 구성부사로서 좌영장을 겸하였다.

이때 건주(建州)의 야인이 침입하여 안주성을 포위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 안주목사 김준(金浚)과 더불어 야인의 격퇴를 위하여 안주성의 백상루(百祥樓)밑에 군졸로 포진하였다.

이때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옴에 일시에 적을 공격하니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야인이 크게 패하여 일시 후퇴하였다가 전열을 가다듬어 대군으로 다시 침범함에 장병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으나, 진영이 적에게 함락되어 남이흥과 김준이 전사하였다. 더욱이, 군량이 고갈되고 원병이 오지 않자 전장병과 함께 죽기를 결의하고 누상에 올라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84년(숙종 10) 안주의 민충사(愍忠祠), 광주(光州)의 경렬사(景烈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梅山集


♡ 전동흘(全東屹)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천안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가재(佳齋).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하고, 용맹을 인정받아 북벌을 기도하던 효종에 의하여 발탁되었다. 이상진(李尙眞)·소두산(蘇斗山)과 함께 3걸로 불렸다. 내외의 무관직을 역임한 뒤 수령이 되어 여러 군현을 다스렸다. 1662년(현종 3) 고부군의 환곡허록사건(還穀虛錄事件)과 관련하여 일시 처벌받았고, 1672년경에는 정초중군(精抄中軍)이 되기도 하였다.

  1673년 함경도남병사에 임명되어 이후 4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함경도 군향(軍餉) 환곡(還穀)의 부족분 7,706석의 탕감을 관철시켜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그뒤 총융사를 거쳐 포도대장에 이르렀다.

일찍이 철산부사가 되어 억울하게 죽은 장화(薔花)·홍련(紅蓮)의 원한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 포도대장 (조선 관직) [捕盜大將]

출처: 브리태니커

조선시대 포도청의 책임자.

포도청의 직제는 〈경국대전〉 반포 후에 만들어져 〈속대전〉부터 법전에 수록되었다. 종2품직으로 좌·우포도청에 1명씩 두었다. 포도청의 업무를 총괄하는 것 외에 친국(親鞫)이나 정국(庭鞫), 또는 왕이 명령한 죄인의 취조에 좌·우포도대장이 함께 참여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朝鮮名臣錄


☺팔거전씨(八莒全氏)

  시조 전원태(全元台)는 도시조 전섭의 25세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합단군(哈丹軍)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친 공으로 팔거군(현재의 칠곡)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팔거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고려시대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전대(全代)를 비롯하여

도수(都守)를 지낸 전광옥(全光玉),조선시대에 선전관을 지낸 전윤후(全胤後), 지평(持平)을 지낸 전응용(全應龍) 등 관 직자를 많이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강을 세웠다.

  전철활(全哲活)은 조선시대에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냈고,

  전영활(全榮活)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으며, 전희택(全希宅)은 공조참판, 전성하(全性夏)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을 역임하였다.

[인구] 323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학(學) 옥(玉) 순(淳) 윤(胤) 수(守) 건(建) 순(舜) 응(應) 영(英) 정(程) 인(仁) 천(天) 필(弼) 성(性) 택(宅) 동(東)봉(奉) 상(相) 기(基) 석(錫) 호(浩) 환(桓) 희(熙) 형(鎣) 우(雨)


☺평강전씨(平康全氏)

  시조 전승은 도시조 전섭의 28세손이다.

그는 고려 때 시중을 지냈으며, 아들 전빈(全賓)은 고려 공민왕 때 정언(正言), 숙천부사(肅川府使) 등을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 되자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평강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하여 평강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전후백(全厚白)은 군수를 지냈고,

전수산(全壽山)은 대호군(大護軍), 전성로(全誠老) 는 정랑(正郞)이 되었으며 전기제(全起濟)는 감찰, 전성천(全性天)은 병조좌랑, 전기한(全起漢)은 현 감을 역임하였다.

  전유형(全有亨)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1594년 청안현감(淸安縣監)이 되었다.

그는 160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고 이듬해 감찰이 되었으며 광해군 때 형조참판이 되었다.

또한 의술에도 능하여 오장도(五臟圖)를 그렸고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외에 전이근(全爾根)은 효자로서 그 이름을 빛냈으며 병마절제사를 지낸 전홍영(全弘永), 의병활동을 했던 전백현(全伯鉉) 등이 전해진다.

[인구] 2,821명이 있다.(1985년)


♡ 전유형 (全有亨)

   1566(명종 21)∼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숙가(叔嘉), 호는 학송(鶴松). 인()의 아들이다.

괴산의 유생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듬해에 왜군을 방어하기 위한 책략 10여조를 올려 선조의 칭찬을 받았으며, 재주를 인정받아 군자감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임하였다.

이때 다시 민심수습방안 등을 상소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도 주목을 받아 

1594년(선조 27)에 특별히 청안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충청도조방장을 겸하여 왜적의 격퇴에 노력하였다.

  1603년에는 붕당타파·세자보호 등을 포함한 시사(時事)에 관한 15조목에 이르는 소를 올려 조정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605년 40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감찰로 발탁되었으나 전란 중에 부모의 상을 의례에 맞게 치르지 못한 것을 빌미삼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다시 서용되어 함흥판관 등의 외직을 거쳐 분병조참의·광주목사(廣州牧使)·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이이첨(李爾瞻)과 세력을 다투던 임취정(任就正)과 결탁하여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오장도 五臟圖〉를 그렸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문안사로 발탁되어 모문룡(毛文龍)에게 가서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운 연유를 설명하고 이를 주선하게 하였으며, 평안도를 내왕할 때 창성·의주 등 성의 방비상태를 아울러 살피고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동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이유림 옥사(李有林 獄事)가 일어나자, 그를 석방시켜 벼슬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당류를 고변하게 하자고 청하였다가 조정을 멸시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정상적인 절차도 없이 성철(成哲) 등 37인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신원이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42년(영조 18)에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송집》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大東野乘

[항렬표]

형(鎣) 우(雨) 인(寅) 병(炳)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박(薄) 모(模) 경(炅) 준(埈) 주(鑄) 환(渙) 병(柄) 걸(杰) 찬(瓚) 수(銖) 형(泂) ? 황(煌) 은(垠) 강(鋼)  철(澈) 종(棕) 욱(煜)


☺함창전씨(咸昌全氏)

  시조 전살리는 전씨의 도시조 전섭의 29세손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상서를 역임하고 좌리공신으로 함창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하여 함창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인구] 830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형(鎣) 우(雨) 인(寅) 병(炳) 영(瑛) 탁(鐸) 제(濟) 표(杓) 찬(燦) 재(宰) 상(商) 구(求) 계(桂) 휴(烋) 규(珪) 태(兌) 한(翰) 목(穆) 형(炯) 순(珣) 용(鏞) 준(濬) 장(樟) 도(燾) 정(珽) 일(鎰) 홍(泓)  환(桓) 희(火義) 선(璿) 훈(金義) 흡(洽) 기(杞) 효(火高) 배(培) 옥(鈺) 박(薄) 모(模) 경(炅) 준(埈) 주(鑄) 환(渙)


☺황간전씨(黃澗全氏)

  시조 전익은 도시조 전섭의 26세손이다.

그는 고려시대에 형부상서로 있으면서 몽고군이 침입할 때

형 전흥(성산전씨의 시조)과 함께 적을 토평한 공으로 황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하여 황간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집성촌]

함북 온성군 남양면

[인구] 301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유(有)  (水)변  치(致)  규(圭)  현(鉉)  주(周)  규(圭)  성(星)


3. 육파계도

♧ 제1파:판서공파(判書公派)

대표인물은 전수송(守松)이고, 평북 의천군(宜川郡)을 중심으로 전국 각 지방에 살고 있다.


♡ 전수송(全守松)

정선전씨 25세손으로

고려 신종(제20대 고려왕,1197년 - 1204년) 때 호부상서를 역임하였다.

▷호부 

고려 말기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粮)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상서 

 고려 시대에 둔 육부(六部)의 으뜸 벼슬. 성종 14년(995)에 어사(御事)를 고친 것으로 정삼품이며, 뒤에 판서(判書), 전서(典書)로 고쳤다.


제2파: 복야공파(僕射公派)

대표인물은 전길()이고, 평북 정주군(定州郡)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 전길(全佶)

  정선전씨 28세손으로,

  공께서 밀직부사로 재임 시인 고려 고종18년(서기 1231년) 8월에 몽고 태종은 고려국을 침략할 계략을 세우고, 몽고의 장군 살례탑으로 하여금 고려국을 치게하였다.

  몽고 장군 원수(元帥) 살례탑이 별군을 이끌고 우리나라 의주 땅에 침범하였을 때, 문무를 겸비한 공께서는 이들 침략자들을 좌시할 수 없어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정신으로 휘하군졸을 거느리고 용약출정(勇躍出征)하여 의주에서 몽고병을 맞아 격전 끝에 몽고군 다수를 살육하고 포로로 붙잡아 크게 전공을 세워 고려국의 위맹을 떨친바가 있었다.

  그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공의 훈공을 인정하고 첨의부좌복야(僉議府左僕射)로 제수하였다.

▷첨의부

  고려 후기 중앙의 최고 행정관청으로,

1275년(충렬왕 1) 원의 간섭에 의해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해져 첨의부로 되었다. 1293년에 도첨의사사로 개칭되었으며,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문종 때의 관제를 복구할 때 첨의부가 없어지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각각 복구되었다. 그러나 1362년 다시 합해져 도첨의부로 되었다가 1369년에 문하부로 바뀌었다.

▷좌복야

  고려시대에는 백관(百官)을 총관하던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2품 벼슬이었다. 상서좌복야의 줄인 말이다. 문종 때에는 상서령(尙書令) 다음가는 차관직이며, 1275년(충렬왕 1) 상서도성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될 때 폐지하고, 1298년(충렬왕 24)에 다시 첨의부에 두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상서성이 다시 설치됨에 따라 여기에 다시 두었다가 폐지되었다. 


제3파: 채미헌공파 (採薇軒公派)


  대표인물은 전오륜(五倫)이고, 경남 거창군과 강원도 정선군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 전오륜(全五倫)

  정선전씨 29세로서 채미헌공파 파조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이며, 호는 채미헌(採薇軒)입니다.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외직으로는 합천군수, 진주목사,경상도안렴사, 내직으로는 국자감제주, 한림학사 집현전 대제학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형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 두문동(杜門洞)에들어갔으며, 태조 이성계가 조선에 협조할 것을 회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함으로 정선으로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후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에 은거하였다.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두문동 72현중 7현이 정선 서운산(瑞雲山)으로 내려와 산나물 등을 뜯어먹고 살면서 절개를 지킨 곳이 거칠현동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採薇軒實記


제4파: 석릉군파(石陵君派)

대표인물은 전윤장(允臧)이고 정선군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 전윤장 (全允臧)

 정선전씨30세로, 고려의문신이시다.

공은 천안군 삼태리에서 태어났으며 고려시대에 3명의 정승 전성안(全成安), 이승인(李崇仁), 전윤장(全允臧) 이 태어났다고 하여 지금도 삼태리로 불리고 있다.

 고려시대 충숙왕(1332-1339)때 출사하여 충혜왕(1339-1344), 충목왕(1344-1348),충정왕(1348-1351), 공민왕까지 5대에 걸쳐 역사의 격변기 동안 국가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여 왔으며, 특히 원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교묘하게 대처하여 후환이 없도록 노력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頔)이 반역을 꾀하였을 때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1343년 우상시(右常侍)에서 서해평양도순위사(西海平壤道巡尉使) 가 되었다가

  1347년(충목왕 3)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교주도도순문사(交州道都巡問使)가 되어 쌍성(雙城)의 인구를 조사하였다.

  1348년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 가는 강릉대군(江陵大君: 뒤의 공민왕)을 호종한 공으로

  1351년(공민왕 즉위년)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다.

♤첨의찬성사:

  고려 후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의 정2품 관직.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하여 관제를 개편할 때 기존의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와 첨의찬성사를 통합해서 고친 이름으로 정원은 3명을 두었다. 뒤에 다시 찬성사로 복원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관제개혁 때 평장사로, 1362년 도첨의부가 문하부로 개편될 때 문하찬성사로 개칭되어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제5파: 호군파(護軍派)

대표인물은 전영부(英富)이고, 함북 경성군(鏡城郡)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 전영부(全英富)

  정선전씨 30세로,

  고려조에서 80명에서 경서에 밝은 사람 9명을 선발하는데 한 분으로 뽑혔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7년 7월11일 순녕군(順寧君) 이지(李枝), 중추원 상의 이천우, 첨절제사 전영부(全英富)· 장철(張哲) 등을 바다에 보내 갑사·척석군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왜구를 쫓아내게 명령하였으며, 공은 왜구를 효과적으로 격퇴한 공을 세웠습니다.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셨다.

▷첨절제사

 출처: 브리태니커

  종3품 지방 무관직(武官職).

약칭은 첨사(僉使)이다. 병마첨절제사와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 초기 군사체제적인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거진(巨鎭)의 장(將)이었다. 거진은 각 도(道)의 군사거점으로 주변의 제진(諸鎭)을 통솔했다. 이들은 무예시험을 통과해야 선발되었으나 무과급제자·겸사복·내금위는 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


제6파:임하군파(臨河君派)

또는 후석릉군파(后石陵君派)

  조선시대 3등 호성공신인 석릉군(石陵君) 전용(全龍)의 후손으로 경기도 시흥시(始興市)를 중심으로 성주(星州), 칠곡(漆谷), 대구(大邱), 강릉(江陵) 등지에 살고 있다.

  성주(星州)에는 후석릉군 용()의 4자() 어모장군부호군(禦侮將軍副護軍) 대붕공(大鵬公)과 5자() 군자감정(軍資監正) 대봉공(大鳳公) 형제가 임란때(1592) 시흥으로부터 남하(南下) 성주(星州)에 이거(移居)하였으니 곧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금수면(金水面) 무학리(無鶴里) 선암(船岩)(배바위)를 중심으로 용암면(龍巖面) 중거(中巨), 월항면(月恒面) 인촌(仁村), 초전면(草田面) 봉정(鳳亭) 등지에서 400여 년 동안 살고 있다.

♡전용(全龍 )

   정선전씨42세로, 자는 여견(汝見)이시고 호는 석천(石泉)이시다.

 안동 하회마을 유성룡 댁에 들리면 공신록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선조때 3등 호성공신입니다. 호성공신(扈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님을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데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훈호이며, 1604년(선조 37)에 86명을 3등으로 나누어 녹훈(錄勳)하였다.

  1등에는 이항복· 정곤수의 2명, 2등에 신성군(信誠君)· 이원익· 윤두수· 심우승· 이호민· 윤근수 · 유성룡· 김응남 등 31명,

  3등에 전룡(全龍), 허준(許浚) 정탁· 이헌국· 유희림· 이유중· 임발영· 기효복 등 53명이시다.

  공은 선조 임금님의 신하로서 의주까지 피난하는데 가까이서 모시고, 종묘의 사주(위패)를 모시고 오는 과정에서 왜군들에게 왼쪽뺨과 왼쪽귀가 떨어져 이빨이 드러나는 중상을 입고 임무를 완수 하는 등 큰 공을 세워 호성공신으로 되었으며, 벼슬이 2계급 특진하였으며, 상으로 노비7명, 토지60결, 말1필, 은자 등을 하사 받으셨다.

  子 대익 음서로 경상북도 청송부사, 평안북도 벽동군수를 역임하셨다.

4. 항렬도


53

54

55

56

57

58

59

(濟)

(杓)

(燦)

(宰)

(商)

(求)

(桂)

60

61

62

63

64

65

66

(烋)

(珪)

(兌)

(翰)

(穆)

(炯)

(珣)

67

68

69

70

71

72

73

(鏞)

(濬)

(樟)

(燾)

(珽)

(鎰)

(泓)

74

75

76

77

78

79

80

(桓)

(火義)

(璿)

(金義)

(洽)

(杞)

(火高)

81

82

83

84

85

86

87

(培)

(鈺)

(薄)

(模)

(炅)

(埈)

(鑄)

 54세 全○杓    55세 全燦    56세 全○宰    57세 全商○

 58세 全○求    59세 全桂○   60세 全○烋     61세 全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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