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旌 善 全 氏 ★★

정선전씨 중시조 전 선 이야기

별고을 동재 2009. 4. 8. 12:05

중시조입니다.  신라 성덕왕때 추부시랑(고려 공민왕때 관제로 환산하면 전법판서)역임하셨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성덕왕(聖德王, 702~737)대는

통일신라의 전성기로서 당나라 문화수입에 힘써 사신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성덕왕 16년(717)에는

수충이 당나라에서 가져  온 문선왕(文宣王, 孔子)과 십철(十哲, 공자의 제자 10인), 72현(, 공자의 제자 중 6에 능통한 자)의 도상을 바치므로 대학에 모셨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을 만들었으며,

723년에는 혜초가 서역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했다.

  성덕왕 22(西紀 723) 봄 3월 왕이

全公을 당에 사신으로 보낼 때 포정( 나마천승의 )과  정완(대사충훈의 ) 두 명의 미녀와 함께

 의복, 그릇, 노비, 수레와 말을 주어 예를 갖추어 보냈더니,

 당 현종(685~762)이 이에 대해 말하기를

"여자들은 다 왕의 고자매(姑姉妹, 고종자매)로서 친척을 떠나고 고국을 이별하여 왔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 못하겠다. "하며 후한 선물과 함께 공주(公主)로 봉()하여 돌려 보냈다.

  이 공주와 함께 신라에 돌아오니 성덕왕은

국위를 선양한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신라 때 벼슬이 추부시랑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하고

정선에 채녹지(采祿地, 농사를 짓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땅)를 하사하여 정선에 살게하니

 후손들이 정선으로 위관(爲貫, 본관을 삼음)하였다.

  정선군 남면 낙동리 남창마을 뒷산이 서운산(903m)이다. 앞에는 백이산(伯夷山)이 마주보고 있는데, 산세의 수려함은 다른 산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빼어나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瑞雲山

  (어떤 도인이 정선군 서운산을 바라보니 다섯가지 색깔의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 나서  청룡이 뛰노는 듯 하였다. 

  여기에 묘소를  쓰면  미래 세상 국가와 사회 발전에  헌신할  큰 인재가  날  곳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전씨 문중에 알려 주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에 묘소가 있으며,  8청룡 9백호가  호위하는    9룡쟁주(九龍爭珠) 대지(大地)이며,   

[♧구룡쟁주: 9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국으로 첩첩산중이고,   圍繞 (위요)한 산줄기는  萬疊 (만첩)을 이루어져  開面環拱 (개면환공)하니, 수구는  重重關鎖  (중중관쇄)  曲曲緊塞 (곡곡긴새) 하였으니  가히 “ 兵禍不入之地 ”(병화불입지지)이다. 

  높이 솟은 봉우리는 웅장하고 화려하다.  佳穴大地 (가혈대지)이요, 어찌 예사로 얻을수 있단 말인가!

  靑龍 (청룡)이 如意珠 (여의주)를 물고 등천할까!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 장관이다.   

   당대에 크게 발복하여 9대에 걸쳐 장상(재상)이 연출하고, 부마도 당연히 나온다 .]

  대한민국  제12대  전두환대통령이 취임할 즈음에는 산소 앞  잔디가  꽃의 형상으로 색깔이 변하였다고  전하여 오며,  최씨 등  다른 성씨들이  산소를  답사하고  다음에  대통령 한 분이  더  나올  좋은 터라는 이야기를  하였다는  사실이  전하여 옵니다.

  어떤 분은  득수(得水)까지  거리가 멀어 발복이  느리지만  안산(案山)이  겹겹히  쌓여 지기(地氣)가  오랫동안  유지되며, 혈처 앞을  에워싸는 조산의 모양을 보아  국가발전에  공헌하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리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서운산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높은 기개가 서려있는 장소이며, 불사이군의 충절과 절개가 있는 곳이며,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는 한시를 지은 전오륜의 올곧은 선비 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참고로 공의 후손으로

고려시대 대제학 전오륜

(정선전씨 29세),

조선초기  축산부원군  전원발

(정선전씨 용궁파, 용궁전씨)

조선초기  문평공  대사헌 전백영

(정선전씨 경산파, 경산전씨)

조선시대  임진왜란 의병장 전치원

(정선전씨  완산파, 완산전씨)

조선시대 대사헌 충간공 전 식

(정선전씨 옥천파,옥천전씨),

조선후기 효자 전오륜

(정선전씨  용궁파, 용궁전씨)

조선말 녹두장군 전봉준

(정선전씨 천안파, 천안전씨),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유산의 수문장,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 간송 전형필

(정선전씨 47세)

 전두환 대한민국 12대 대통령

(정선전씨 52세 완산파, 완산전씨)

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 전오륜(全五倫)

  정선전씨 채미헌공파 파조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이며, 호는 채미헌(採薇軒)입니다.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외직으로는 합천군수, 진주목사, 경상도안렴사, 내직으로는 국자감제주, 한림학사 집현전 대제학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형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며, 태조 이성계가 조선에 협조할 것을 회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함으로 정선으로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후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에 은거하였다.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두문동 72현중 7현이 정선 서운산(瑞雲山)으로 내려와 산나물 등을 뜯어먹고 살면서 절개를 지킨 곳이 거칠현동이다.

당시 칠현은 한맺힌 마음을 한시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불렀는데, 지방의 선비들이 이를 듣고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알려주면서 구전되던 토착요(土着謠)가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東來朝服在臣身/

동쪽으로 올 때 가지고 온 조복으로 갈아입고

  遙望松京哭滿巾/

송도를 바라보니 애달파 눈물만 흐르네

  唐虞世遠吾安適/

요순성대 가버렸으니 어디서 머물리요

  矯首西山繼絶塵/

서산을 향하고 세상 인연을 끊네

채미헌(採薇軒) 전오륜의 시다. 이 시는 개성의 남동쪽에 있던 광덕산 부조현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머물던 상황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 동쪽을 정선땅으로 해석해도 잘 어울린다.

  전오륜이 정선에 은거하며 여주에 은거하던 이색과의 접촉 등으로 암울한 시국상이 정선인들에게 반영된 것이다. 이때의 상황이 아라리에 반영되여 형성된 사설이 정선아라리의 제1절격인 다음의 사설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 질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採薇軒實記 

 

 

◎ 거연정

고려시대 말기 전오륜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시서(全時敍)가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에 정자를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전원발(全元發   

 ?∼1421(세종 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이다.

전법총랑(典法摠郞) 충경(忠敬)의 증손으로, 판도총랑(判圖摠郞)

대년(大年)의 손자이며,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진()의 아들이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영록대부(榮祿大夫)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작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 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가 있다.

아들에 사복판사(司僕判事) 한()이 있으며,

손자 강()·근()·경()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으로서 현달(顯達)하였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百氏通譜  

(청원정,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

 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
 

♡전백영(全伯英


시호는  문평(文平)이며

 생몰년 미상.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공민왕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75년(우왕 1) 간관으로서 우헌납 이첨과 더불어 재상 이인임의 죄를 탄핵, 그의 처형을 요청하였다가 도리어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간의(諫議)를 역임하였고,

 1397년(태조 6) 병조전서로서 서북면선위사에 임명되어 축성에 적당한 곳을 찾아 나섰다.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출척사(豊海道都觀察黜陟使),

 1399년(정종 1) 대사헌, 다음해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거치면서 불교가 인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왕이 이를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401년(태종 1) 노비변정도감제조(奴婢辨正都監提調)·경상도도관찰출척사, 1404년 승녕부윤(承寧府尹)을 지내고, 이해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무동재)

♤전치원(全致遠)

전치원(1527∼1596)의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으로 초계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7년(중종 22년)에 초계군 도방리(지금의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에서 아버지 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탁계집(濯溪集)』 5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전치원은 15세(1541년)에 당시 재령(載寧)군수로 재임하고 있던 할아버지(永綏)를 따라가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자질이 호방한 것을 알고 무예를 가르치고자 했다.

 16세(1542년)에는 재령에 머물면서 여름에 『소학』을 가지고 황강(黃江, 李希顔)선생을 찾았는데, 황강선생은 그에게 ‘『소학』 배울 나이가 이미 넘었으므로 제자로 받아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전치원은 5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가르침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의 자질을 시험해 본 황강선생은 ‘장차 대성할 인재’라 생각하고 비로소 제자로 삼았다.

  33세(1559년) 5월에는 스승인 황강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키워준 은혜와 가르쳐 준 은혜가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제삿날이면 반드시 참례하면서 마음으로 3년복을 입었다.

  급문 : 전치원은 29세(1555년)에 삼가 토동정사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30세(1556년)에는 퇴촌동(退村洞)에서 남명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37세(1563년)에는 남명선생을 찾아 덕산의 산천재(山天齋)로 가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벼슬 : 전치원은 67세(1593년)에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강학 및 교유 : 전치원은 35세(1561년)에 황강(黃江)선생의 「묘갈명」을 남명선생이 찬하고 그가 글씨를 썼다.

그는 정자를 짓고 호를 탁계(濯溪)라고 하였는데 이 호는 굴원이 지은 어부사의 구절 중에서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어야 한다’는 구절에서 ‘씻을 탁()자’를 따온 것이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가을 8월에 월와 진극원(陳克元)이 찾아 왔다.

이 때 진극경이 따라와 전치원과 함께 하였으며, 공경하고 중히 여기면서 이르기를 ‘진씨(陳氏)의 가문에 장차 점점 나아감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月窩逸稿』).

37세(1563년)에는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김면, 배신, 이기춘(李起春) 등의 제현들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40세(1566년) 봄에는 김유(金紐)가 찾아왔고,

43세(1569년)에는 김유가 찾아와서 시를 주었다.

 44세(1570년) 3월에는 이효원이 구정(鷗亭)으로 찾아왔고, 정와 조수천이 와서 공부하였으며,

47세(1573년)에는 안극가(安克家)가 찾아와서 경의를 공부하였다.

48세(1574년)에는 이대기가 찾아와서 『중용』을 읽자, 전치원은 성명(誠明)의 이치를 강론하였다(『雪壑先生文集』).

  52세(1578년) 봄에는 강정(江亭)을 완성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벗삼아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이 정자는 후일 손자 전영이 이름을 와유헌(臥遊軒)으로 고쳤으며, 지금의 쌍책면 매호리에 있다.

 59세(1585년) 가을에는 하혼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주었다.

  60세(1586년) 봄에는 고양(高陽)의 벽송정(碧松亭)에 있었다.

가을에 노흠 등과 황계폭포를 유람하였는데, 이 때 이흘(李屹)이 따라와 시를 남겼다.

61세(1587년)에는 진주(晋州) 도동(道洞)으로 최영경을 방문하였고,

 62세(1588년)에는 안극가(安克家)를 방문하였다.

  의병활동 : 전치원은 66세(1592년) 여름 4월에 왜구가 밀어 닥치자 열군(列郡)이 와해되었을 때 이대기와 함께 창의하여 토적(討賊)할 것을 약속하고, 곽재우와 합세하였다(『雪壑先生文集』).

 당시 전치원은 아들 우()와 조카 제()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집안이다.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하니 각자 고을 내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군내에 의병모집 통문을 돌렸으며, 모집된 의병은 외군과 내군으로 편성되어

 내군은 이대기가, 외군은 전치원이 통솔하였다.

이 때 전치원은 진영을 구축하고 몸소 훈련을 시키면서 많은 의병들을 부양할 군량미가 부족하자 사비로 조달하였고, 관곡은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조직된 초계의 의병은 황강 변에서 6월 3일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6월 11일 낙동간 사막진에서 왜선과 왜적을 대피하였고,

 6월 17일에는 낙동강을 도하하는 적을 물리쳤으며, 이 후 수 차례의 소규모 유격전과 대규모 전투에서 모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전으로 말미암아 왜군의 낙동강 도하를 차단하여 초계지방과 우도지역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67세 때(1593년) 정월에 아림의 김면의 진지에 가서 모였다.

  서원창건활동 : 전치원은 38세(1564년)에 황강선생을 위하여 청계서원(淸溪書院: 慶尙南道 地方文化財 136)을 창건하였는데, 이 서원은 지금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있다.

  저술 및 작품 : 전치원은 47세(1573년)에 성운(成運)이 지은 「남명선생묘갈명」의 글씨를 썼고,

55세(1581년)에 추곡 강몽린 상경(祥卿)이 계효당명(繼孝堂銘)을 지었다. 63세(1589년) 봄에는 금병팔첩(錦屛八疊)써서 장자(長子) 우()에게 주었다.

8월에 주부자(朱夫子)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초서로 쓰고, 집에 보관하였다.

67세(1593년) 가을에는 박진사, 이언영이 찾아왔고, 조정에서 화의(和議)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탄(憤歎)하는 시를 지었다.

 69세(1595년)에는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지었다.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전치원은 64세(1590년)에 도내의 제현들과 더불어 최영경의 신원상소를 청하였는데, 이 때 최영경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이로, 박제인, 이정(李瀞), 오장(吳長), 문위(文緯), 하혼 등이 모여 상소추문(上疏推文)하였고, 문경호(文景虎)가 소두(疏首)가 되었다.

  향사 : 전치원은 1596년(선조 29년) 12월13일에 70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후 지역 유림들에 의해 연곡사에 봉안되었고, 1702년(숙종 28년) 청계서원에 배향되었다.

□ 참고자료

  『慶尙巡營錄』.

  『壬辰戰亂史』.

  李  魯, 『龍蛇日記』.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草溪邑誌』.

  『大東野乘』.

  『韓國史大辭典』.

  『韓國人名大辭典』.

  『大韓國史』 5卷.

  『民族文化大百科辭典』 22.

  金德珍, 「濯溪 全致遠과 雪壑 李大期의 義兵活動」,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 전 식(全 湜 

                          

            

 1563(명종 18)∼1642(인조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증이조판서 여림의 아들이다.

유성룡·장현광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익남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이준 등과 산수를 유람하여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제수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하여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하였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님을 들어 이를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에 가계(加階)되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仁祖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增補文獻備考, 凝續雜錄, 凝川日錄, 默齋日記.

 

♤ 효자 전오륜


 전오륜(1631-1720)은 용궁면 읍부리 출신으로,  자는 천서(天敍), 호는 어주(漁洲), 본관은 용궁, 이성(以性)의 손자로, 상구(尙耉)의 아들이다.

이현일의 제자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용모가 단정 우아하고 예절이 발랐다.

1660년(헌종 1)에 진사가 되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홀어머니를 모시려고 과거 시험까지 포기하였다.

 나이 70세 때(1702) 도둑들이 칼과 창을 마구 휘두르며 살던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이 때 전오륜은 자신의 안정보다는 어머니의 안전을 위하여 어머니를 업고 황급히 나오자,

모발이 하얀 늙은이가 100세의 늙은 어머니를 업은 모습을 도둑의 우두머리가 보고 감탄하여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진실한 효자이다. 너희들은 이 집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건드리지 말라"

라고 하였다.

당시 용궁현감 이지석이 이 일을 듣고 전오륜의 효행을 아름답게 여겨 손수 '내무당(萊舞堂)'이라는 3자의 현판을 써 주었는데,

이는 옛날 중국의 효자 노래자가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 70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놀이를 하며 춤을 추던 집이라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소문이 나자,

1714년(숙종 14)에 암행어사 이병상이 조정에 보고하기를,

"전오륜은 나이 70여 세가 되도록,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친히 점검하여 부모님께 올리고,

항상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렸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매일 성묘를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나이 84세에 특별히 임금이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주었다.

뒤에 효행으로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내외교수편(內外交修篇)>, <사무사설(思無邪說)>등이 있고,

남긴 글로는 문집이 있다.

또 용궁향교의 세심루 기문(洗心樓記文)을 지었고, 사헌부 지평 김세흠의 국방 대책에 대한 상소문을 초안해 주었다

[참고문헌] 

嶺南人物考 


♤ 전봉준 [全琫準, 1855~1895]

 

  정선전씨 천안파이다.(천안전씨)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이다.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하였다.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썼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이다.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윽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舊韓國官報

沙鉢通文

梧下記聞

梅泉野錄

續陰晴史

大韓季年史

東學亂記錄 上·下(國史編纂委員會, 1959)

녹두장군 全琫準(金龍德外, 同學出版社, 1973)

전봉준자료집(나라사랑 15, 외솔회, 1974)

全琫準傳記(金義煥, 正音社, 1974)

全琫準의 生涯와 思想(申福龍, 養英閣, 1982)

全琫準供草의 分析(金容燮, 史學硏究 2, 1958)

東學의 리더십(韓㳓劤, 白山學報 8, 1970)

東學敎門과 全琫準의 관계(鄭昌烈,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叢書 Ⅰ, 1982)

東學革命運動과 全琫準(金昌洙, 韓國思想 19, 1982)

全琫準についての一考察(橫川正夫,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 1978)  

 

♤ 간송 전형필

   정선(旌善)전씨 47세손이며, 호는 간송(澗松)으로, 서울 출생이다.

  1926년 휘문(徽文)고보를 거쳐 192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오세창(吳世昌)의 지도로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힘쓰는 한편,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지원·경영하며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1940년 경영난에 빠진 보성(普成)고보를 인수하여 교주(校主)가 되었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보성중학교 교장직을 1년간 맡았다.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이 되고, 1956년 교육공로자로 표창을 받았다.

  수집한 문화재는 그의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현 간송미술관)에 보존하였는데, 수집품 중에는 1942년 일본인 몰래 안동에서 거금 2,000원을 주고 구입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서적·고서화·석조물·자기 등이 있으며, 10여 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2년 문화포장,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전두환 [全斗煥, 1931.1.18~  ] 

                  

 

 

  정선전씨 도시조 전섭의 52세손으로 정선전씨 완산파(완산 전씨)입니다.

  군인 겸 정치가이며,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습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을 지냈습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 하였습니다.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역임 하였습니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다.

   어떤 학자는 우리나라 단군이래로 최대 경제 호황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하였습니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 전두환 대한민국 12대

   대통령 의 대표적인 경제업적   

1. 1980년대 세계 1위의 경제성장률.(200개 국가 중 단독1위)

    1980년대 10년간 한국 연평균 경제성장률   10.1%, 세계 1위의 경제 성장률.

   3저호황(1986년에 시작)이 오기  한참 전인 1983년에  경제성장률      10.8%로  10%대 돌파를 한 경이로움

2. 불과 8년만에 1인당 국민소득(GNP)을 무려 3배로 불림.  

   1980년(집권하던 해) 1500달러대->

   1988년(퇴임하던 해) 4435달러.

3. 전두환 정부 경제정책은 '안정성장'에 초점을 맞췄고 상당 한 성공을 거뒀다.

   경제성장, 물가안정, 국제수지 흑자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고성장을 이룬 82~87년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3.5%로 가장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4. 88 서울올림픽 유치성공

대한민국 국가브랜드의 위상을 높임.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전두환 12대 대통령은 가히 경제대통령, 스포츠대통령 이라 할 만합니다. 

 

                                                 

                          안산(案山)

                                                 

 

 

 


'★ 旌 善 全 氏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장  (0) 2009.07.26
정선 전씨  (0) 2009.07.26
주요 인물   (0) 2009.03.27
정선전씨   (0) 2009.03.27
旌善全氏]   (0) 2009.03.27